누군가를 교육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만 동시에 보람있는 일이기도 하다. 얼굴에 늘 미소가 떠나지 않는 박주희 씨가 하는 일이 바로 어렵지만 보람과 긍지도 느낄 수 교사라는 직업이다.
'스마일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친근한 인상의 플래그스탭 베이시스 학교 박주희 교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선, 언제 미국에 오셨는 지 궁금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저희 가족이 미국에 온 건 지난 2001년이었습니다. 당시 미시간에서 대형 플라자를 오픈하신 큰고모네가 한국의 가족들을 불러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태였지만 미국에 온 뒤 바로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부모님이 하시던 비즈니스를 3년 정도 도와드렸죠.
아리조나로 오시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까?
네, 부모님을 도우면서 열심히 사는 것도 좋았지만 공부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환경을 좀 바꾸는 차원에서 아리조나에 거주하는 사촌언니에게 가자고 결심했습니다. 사촌언니가 하시던 일을 도우면서 메사 커뮤니티 칼리지에도 등록해 한, 두 과목 씩을 수강해 나갔습니다. 그게 2004년도 일이군요. 그 뒤로 여동생과 부모님도 모두 아리조나로 이주해 왔습니다.
어떤 전공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하셨습니까?
메사 커뮤니티 칼리지를 다닐 당시엔 음악으로 환자들을 치료하는 뮤직 테라피를 전공하려고 했습니다.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해서 피아노도 치면서 환자들도 돌보는 그런 걸 상상했는데 저를 좋게 봐주신 한 교수님이 뮤직 테라피 분야에선 생각보다 음악을 할 일이 없을 것이라며 차라리 피아노 연주를 전공하는 게 어떠냐고 권유해 주셨습니다. 2008년 그 교수님의 소개로 NAU(노던 아리조나 주립대학)에 입학 오디션을 봤고 뜻밖에도 NAU에서 전액 장학금을 줘 기쁜 마음으로 입학하게 됐습니다.
피아노를 전공하시다 현재 교사의 길로 접어들게 된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피아노를 전공하면서 공부를 하다보니 대학에서 배우는 수학이 참 쉽게 느껴지더군요. 제가 원래부터 수학을 좋아하기도 했구요. 그래서 부전공으로 수학도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중 졸업연주회를 앞두고 태권도를 하다 손을 다치게 됐습니다. 새끼손가락과 네번째 손가락 사이 근육 부상이었는데 주사를 맞고 졸업연주회는 어찌어찌 마쳤지만 대학원 진학을 위해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기에는 힘든 상태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던지 아니면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을 것을 권했고 지도교수님도 너무 무리하게 손을 사용하면 피아노를 다시 치기 어려울 수도 있다며 조심하라는 조언을 해주셔서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고민 뒤 진로를 수정하기로 하고 음악과 수학 2개를 전공으로 공부해 학부 과정을 마치게 됐습니다. 그리고 역시 스칼러십을 받고 수학교육 전공으로 2014년엔 석사 과정까지 마무리 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를 전공으로 할 수 없어 아쉬움이 컸지만 다행이도 제가 수학의 재능과 흥미가 있어 그 분야를 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석사 졸업 이후엔 파트타임 조교로서 커뮤니티 칼리지 등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누군가를 교육하는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플래그스탭 베이시스(Basis) 학교와는 어떻게 인연이 시작됐습니까?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2+2와 같은 지극히 간단한 산수를 계산기를 꺼내서 하는 걸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쉬운 것까지 왜 계산기를 사용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 어느 날 한 학생에 물어봤죠. 그랬더니 그 학생 대답이 어릴 때 수학시간에 흥미를 갖지 못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자신감이 없어 아주 사소한 문제에도 실수를 할까 봐 계산기를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그 때 문득 제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어릴 때부터 수학에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내가 잘 가르쳐주면 어떨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016년 플래그스탭 베이시스 학교에 지원을 했습니다.
베이시스에서 시작한 교사 생활은 어떠셨습니까?
처음에 부임하니 학교 측에서 제게 3, 4학년 아이들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3, 4학년이니 가르치기가 쉽겠다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다 보니 학교에서의 생활지도까지 책임져야 해서 처음엔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뒤 중학생인 6~7학년을 맡게 됐습니다. 이 학년의 아이들은 사춘기인 학생들이 많아 선생님 말을 잘 안듣는 특징(?)이 있고 불평도 되게 많고 이성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쓰는 그룹이라 역시 그 나름대로 지도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아리조나와 타주에 있는 모든 베이시스 학교들이 1년에 한 번 씩 학교 자체적으로 모의고사를 보게 되는데 시험을 본 뒤 성적들이 서로 비교되니까 학업지도에 대한 압박감도 느낍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의 시간들이 지나고 올해는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선 어떤 선생님으로 알려져 있으신지요?
제 생각에는 학생들에게 친근한 선생님이라고 자평하는데 제 남자친구 말로는 '그게 만만한 선생님이란 뜻'이라고 하더군요. (웃음) 그게 어느 쪽이든 간에 아이들이 부담감 없이 말도 잘 걸어오고 질문도 스스럼 없이 제가 하는 걸로 봐서 친구같은 선생님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저로서는 만족스럽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항상 친구같아서는 안되겠죠. 얼마 전 선생님들을 지도하는 멘토링 선생님이 제 수업을 참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선생님의 평가에 따르면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아이들의 학습과 수업 이해도를 높이는 저의 긍정적인 교수법이라고 칭찬해주셨지만 그 반면 저와 아이들이 함께 말이 뒤섞이면서 대화를 할 경우 어느 부분까지 들어줘야 하는 지, 어디서 단호히 끊어줘야 하는 지를 정확히 해야 하는 부분은 부족하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대학 조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총 7년이란 시간을 누굴 가르치는데 사용해 왔지만 지식 전수만이 아닌 아이들의 인성발달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다른 교사분들과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점 등 아직 교사로서 배워야 부분은 많다는 걸 절감하고 있습니다.
교사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실 때는 언젠가요?
제가 예전에 가르쳤던 아이들이 아직도 저를 기억해주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때도 언급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을 때인 것 같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제 학창시절에도 여러 선생님들이 계셨지만 좋은 의미에서 제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몇 분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을 혼내거나 훈육할 때 아이들이 내가 자기네들을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날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일 때도 '가르치는 보람이 이런 거구나'하는 게 피부로 와닿습니다. 또 개인학습 시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데 그런 시간에 자신의 집안 이야기나 고민을 털어놓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전 별로 하는 것 없이 거의 들어주기만 하는데도 아이들은 고마워 합니다. 그 때도 '내가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구나'하는 면에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매주 반주하는 미국 교회에 제 학생 할아버지, 할머니도 같이 다니시는데, 얼마 전 그 학생에게 일어난 일들도 제게 알려주시고 해서 학생뿐만 아니라 학부형들도 서스럼 없이 저와 문제를 상의해주실 때 고마움과 보람을 함께 느끼기도 했습니다.
반면 힘든 점은요?
조용히 하라고 하는데 조용히 하지 않을 때죠.(웃음) 그리고 이런저런 불평을 자꾸 쏟아낼 때나 분명히 몇 번을 가르쳐 줬는데 시험 때 틀리고 나서 배운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하면 무척 황당스럽기도 합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교사 생활을 한동안은 이어갈 생각입니다.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고 그런다면 학교 교단에 계속 설 수 있을 건지는 조금 생각을 해봐야 겠습니다만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튜터링 같은 걸로도 누구를 가르치는 일만큼은 이어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제가 현재 플래그스탭 시립합창단에 피아노 반주를 맡고 있고 NAU 내 바이올린 전공학생들의 모임인 '스즈키'에서도 피아노 반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비록 피아노 전공을 계속하진 못했지만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를 이런 무대들을 통해 계속하고 싶은 바램도 있습니다. 지금은 시애틀에서 약사로 일하고 있어 장거리 연애 중인 남자친구가 조만간 피닉스로 이사오게 되면 저도 피닉스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오늘 시간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모쪼록 더 좋은 교사가 되시길 바랍니다.
네,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