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주의 대표적인 한국 사찰인 감로사. 지난해 말부터 종화스님이 감로사의 주지스님으로 소임을 맡게 됐다. 종화스님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봤다.
반갑습니다. 언제 감로사에 오셨습니까?
네, 반갑습니다. 2020년 3월 중순에 처음으로 아리조나를 방문해서 감로사를 둘러봤고 4월에 한국으로 나가서 비자 준비를 하던 와중에 백중 때문에 9월 초 잠시 왔다가 또 한국으로 간 뒤 12월에야 완전히 들어와서 감로사에서의 소임을 맡게 됐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오는 것이 조금 늦어졌습니다.
아리조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을 텐데 이곳으로 오시게 된 연유가 있으실까요?
처음엔 뉴욕 원각사의 주지이신 지광스님이 워싱턴에 있는 연화정사에서 소임을 볼 생각이 있냐고 해서 미국으로 왔다가 연화정사 내외부의 문제 때문에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자 지광스님께서 아리조나 감로사에 잠시 가있으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방문하게 됐습니다. 2020년 3월 아리조나 공항에 내려서 나와 보니 한국이나 미 동부와는 너무도 다른 건조한 날씨, 생경한 풍경이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감로사에 들어 와 보니 너무 아늑하고 좋은 느낌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감로사에 각현스님(서울 구룡사 정우스님 상좌)이 잠시 와 계셨는데, 제가 감로사에 온지 3일 만에 감로사에 살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스님께서는 조금 더 생각해보라고 하시면서 약간 밀어내는 느낌이었어요. 일주일 뒤 다시 말씀드리니 감로사의 이사장이신 정우 큰 스님과 전화를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큰 스님께서 우리 불자님들의 참다운 귀의처가 될 수 있도록 잘 살아 달라고 당부해 주셔서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선 어느 절에 계셨는지요?
한국에 있을 때는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한 뒤 해인사 율원에서 2년을 살았습니다. 참고로 율원이란 사회에서 법을 다루듯이 스님들이 지켜야 할 법, '계율'을 공부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대구 도림사에서 포교국장 소임을 맡았었고 이후 미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너무 상투적인 질문인 것 같긴 하지만 출가하시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요?
한국에서 템플 스테이를 많이 운영했었는데 찾아오시는 젊은 분들 열에 아홉은 제게 출가 이유를 물으셨습니다. (웃음) 제가 생각하기에 스님들이 출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진리/가르침과 깨달음의 맛을 보고 싶어서 출가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케이스는 포교를 위해서 출가하는 분들도 있다고 봅니다. 사실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하는 것과 포교를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저는 후자에 해당됩니다.
부모님들이 불심이 강한 분들이었기에 어려서부터 절은 자연스럽게 다녔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때, 당시 다니던 절의 스님이'‘방학 때는 와서 자원봉사 좀 해봐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다 졸업을 앞두고 스님의 권유로 1년 정도 기도 겸 봉사 겸 절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절에서의 생활은 단순했습니다. 기도하고 밥 먹고 일하고.. 그리고 취침.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스님께서 출가 권유를 종종 하셨습니다. 그럴 때 마다 저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스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너는 꿈이 뭐냐?' 저는 또 출가를 권유하실까봐, '네 저는 평범한 아버지 되는 것이 꿈입니다.'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복돌이(당시 절에서 키우던 개) 하고 너하고 뭐가 다르냐? 복돌이도 밥 먹고 자고 때 되면 종족번식 한다. 너가 평범한 아버지 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적당히 먹고 살며, 종족번식 하고 살고 싶다는 것 아니냐?' 이 질문에 저는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뭐지? 복돌이 하고 내가 뭐가 달라야 할까? 어떻게 달라야 할까? 그때부터 알게 모르게 그 질문은 나에게 숙제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러다 그곳에서 지내는 1년이 2년, 3년이 되던 언젠가 절에 오는 신도들을 보는데, 뭔지 몰라도 밑도 끝도 없이 참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 때 문득 저 사람들과 밝은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답을 부처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몇 해 후 해인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출가하신 뒤 생활이 평소에 상상하시던 것과 비슷하던가요?
깨달음, 치유, 포교 등에 대한 답이 절 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갔지만 처음엔 기대에 미치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승가대학 시절 깨달음에 대한 담론을 하는데 스님들마다 깨달음에 대해 가진 이미지가 모두 다른 것 같았습니다. 그건 저에게 큰 충격적이었습니다. 모든 스님들이 깨달음을 품고 출가를 하는데 목적지가 모두 다르다면 나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이 문제를 놓고 한동안 심적으로 방황하기도 했었죠.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결국 이미지가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미지가 아닌 것을 개념화, 이미지화 시키려고 했으니 처음부터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반스님의 조언으로 깨달음에 대한 이미지를 부수려고도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다시 사람들에게 개념화해서 말한답니다. (웃음)
평소 미국에서 포교를 하시겠다는 생각이 있으셨는지요?
네. 예전부터 미국은 오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존경하는 사형스님이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의 성격)는 미국 가서 포교하면 참 좋을 것 같다. 요즘은 태어난 곳에서 죽어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세계 어느 곳이든, 한국 선방에서 수행하듯 그곳에서 수행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 그게 포교이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 말씀이 저에게 굉장히 큰 울림으로 와 닿았습니다.
또 3년 전 쯤 미국에 만행을 온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들어와 있는 여러 불교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3개월 동안 서부에서 동부까지 엘에이,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뉴욕, 보스턴, 워싱턴 등을 다녀 봤습니다. 한국 절은 물론이고 베트남 절, 일본 절, 태국 절, 미얀마 절 등을 다니며 며칠 씩 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만행 차 온 미국이었는데 3개월의 만행이 끝날 무렵에는 이 곳, 미국에서 포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저를 이 곳 아리조나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의 불교 위상은 어떻게 보이시던가요?
개인적 견해로는 제가 방문해본 곳들은 다들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불교를 믿고 공부하는 인구가 적을 뿐이지 불교를 공부하는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특히 미국화 된 응용불교라고 해야 할까요? 대규모 시설들로 운영되는 메디테이션 센터들과 각 나라의 전통을 살린 선, 명상센터들의 모습이 저에게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면 미국 내 한국불교나 사찰들은 한인불자들 만의 사찰도 있었고 몇몇 사찰은 분란이 있는 모습을 보고 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미국과 같은 다양한 문화, 다양한 언어, 다양한 사람이 사는 곳에서 거의 한국인만을 위한 절로 운영된다는 것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와서 보니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첫째는 절에 사는 스님의 언어능력(영어능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 있을 것 같고, 또 다소 개방적이지 못한 한국인의 특성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부터 영어공부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잘 안 되네요.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로사에서의 소임 기간이 정해져 계신지요?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
감로사에서의 소임이 언제까지라고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인연이 닿는 데까지 머물게 되겠죠. 목표는 감로사를 지금보다 좀 더 업그레이드 시켜 성장토록 하는 것입니다. 한인들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자 하는 많은 분들에게 이곳이 마음의 의지처가 되고 위안이 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고, 더 나아가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감로사가 아리조나에 있음으로써 사람들이 조금은 덜 힘들게, 그리고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또 한 편으로는 감로사의 불자님들이 많아져서 자생능력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17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국불교가 타종교에 비해 신도가 많이 줄게 된 것은 포교에 나서는 스님이 적어서 그렇다고 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명승지에 위치하고 있는 절들이 입장료 수입으로 일정한 수익이 생기다보니 포교에 적극적이지 않게 되었고 잠재된 능력도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이죠. 저는 이런 의견에 일부 동의합니다. 이런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생각해본다면, 현재로서는 신도수가 많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힘들고 아쉽다고 한국의 지원에 기댄다면 우리 스스로 잠재능력을 죽이게 되는 건 아닐까요? 백척간두에서 조차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감로사의 불자님들이 감로사를 소중히 여긴다면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불자를 발굴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께 나누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불자님들과 함께) 열심히 수행하고 살다보면 한국에서든 어디에서든 누군가가 지원이 아닌 보시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에서 오는 지원도 여기의 불자님들과 같은 분들이 먹을 것 안 먹고 쓸 것 안 쓰고 절에 기부하는 돈인데... 오히려 감로사에서 더 힘든 곳을 지원할 마음도 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우리 불자님들이 감로사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저는 감로사가 이사회 중심으로 운영되기를 바랍니다. 소소한 일은 제가 결정을 하고 진행하겠지만 다소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는 감로사의 이사회를 통해 결정하고 진행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이사회를 열어 진행하는 모든 사업과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우리 불자님들의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물론 감로사의 이사장으로 계시는 서울 구룡사 회주 정우스님과 뉴욕 원각사 지광스님과의 원활한 소통은 그 전제가 되어야 하겠죠.
저는 좀 적극적인 성격입니다. 아직 코로나로 조심스러움이 없지는 않지만 여러분들과 많이 만나고 싶습니다. 언제든 절에 오시면 됩니다. 오시기가 좀 어려우면 제가 찾아도 갑니다. 480-625-2436 저의 휴대폰입니다.
우린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죽을 수 있는 수많은 상황을 피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지금이 기적인 것입니다. 이 기적 같은 순간, 이 기적 같은 오늘, 귀한 인연을 만나고 쉽지 않습니까? 이 넓은 아리조나 땅의 유일한 한국 사찰, 감로사에서 고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모두가 행복해지는 소중한 인연을 여러분들과 함께 지어나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