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라고 하니 많이 당황했다.
나에게는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두 어머니가 있다.
한 분은 낳아 주신 어머니, 다른 한 분은 길러 주신 어머니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해마다 아들을 생산했는데 네 번째 아들을 낳은 후 2년을 누워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다만 "엄마가 계신 방에 들어가면 안 돼" 하는 한마디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새 어머니가 우리집에 오신 것은 막내가 세 살, 나는 일곱 살 때인 것 같다.
사십이 가까운 처녀가 애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서울 양반집에 첫 시집을 오신 것이다.
새 어머니는 부지런하시고 말이 없으시며 정성껏 우리들을 돌보아 주셨던 모습이 어머니의 기억이다.
북악산에 눈이 녹고 청계천에 얼음이 녹아 개울물이 맑아지면 무거운 빨래짐을 머리 위에 지시고 이웃집 아주머니와 흘러내리는 개울물에서 많은 빨래를 하셨다.
휭휭 찬바람이 부는 긴 겨울밤에는 애들이 명절에 입을 솜이 두툼한 바지와 저고리를 손수 만들곤 하셨다.
어머니는 초저녁 잠이 많아서 꾸벅 꾸벅 조시다가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면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여러 형제 중에 나는 유난히 요구사항이 많고 성격이 급하고 화내기 잘하며 억지를 잘 부리는 힘든 아들이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밤잠을 설치면서 기워주신 양말을 창피하다고 새 양말을 달라고 억지를 썼다.
새 양말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계속 버티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볼기를 때렸다.
나는 가방을 얼른 들고 집 밖으로 뛰어 나와 학교로 줄행랑을 쳤다.
어머니는 속이 썩는 경험을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해를 거듭하며 겪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힘들게 한 것은 아버지도 한몫했다.
아버지는 완고한 유교 집 안의 장손으로 남존여비의 사상이 머리에 굳게 박힌 분이다.
남편은 하늘이고 아들이 딸보다 귀하다고 고지식하게 믿는 힘든 남편이었다.
아버지와 다른 의견을 표시하거나 불평을 말해서는 큰일난다.
그런 속에서도 어머니는 모든 것을 참고 불평을 접어두고 말없이 사신 분이었다
우리 집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우리는 "새" 엄마를 "엄마"라고 불렀다.
그 분은 새 엄마가 아니다, 세상은 우리를 낳아주신 분으로 알아야 했다.
그것은 엄마의 체면을 지켜주고 우리도 당당한 엄마가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세상을 향한 연극이다.
그것은 우리 체면문화가 가르쳐 준 유산물이기도 하다.
밖에서 보면 엄마는 정성껏 아이들을 먹여 주고 입혀주고 키워주는 훌륭한 어머니시다.
그러면 집안에서의 사실은 어떠했을까?
누가 가르쳐 주었는지는 몰라도 애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새 엄마도 엄마다. 하지만 진작 나를 낳아주신 엄마가 진짜 엄마다"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특별히 어린 시절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그 생각을 잘 써먹었을 것이다.
그러면 엄마는 그것을 알까?
물론이겠지!
그 때마다 엄마는 많이 힘들었겠지.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한 사건을 내가 저질렀다.
부모님을 미국에 오시도록 초빙을 했는데 비행기표를 보낼 때 거기에는 한 장 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항상 말씀이 없는 어머님은 여전히 말씀이 없으셨고 잔소리를 많이 하시고 소리를 잘 지르시던 아버지도 이번에는 말씀이 없으셨다.
그리고 그 비행기표는 다시 돌아왔다.
내 애들을 키우고 그것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는 배신의 아픔을 겪으셨을 것이고 아버지는 자식을 잘못 길렀구나 하는 후회를 하셨을 것이다.
40년이 넘는 옛날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도 자다가도 그 일을 생각하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난다.
꽃이 피는 봄철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간 기억이 난다.
그 힘든 세월 어머니는 부처님을 의지하고 사신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어머님의 마음에는 부처님의 평안이 있었다.
화내는 일도 우리들을 핀잔하는 일도 없었다.
손님을 정성껏 모시며 며느리를 상전 같이 받드는 시어머니를 나는 목격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에 막내 여동생을 얻게 된 것은 분명히 부처님이 어머니에게 주신 선물이었다.
그 딸은 우리가 줄 수 없는 기쁨을 어머니에게 주었을 것이다.
하루의 삶이 힘들고 육신과 마음이 지칠지라도 그 딸을 보면서 위로를 받으시고 기쁨이 넘쳤을 것이다.
나는 어머님에게 빚진 자임을 절실히 느낀다.
막내 여동생을 볼 때 오빠로서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 초기엔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그래도 노년 길에 어머님은 50년 결혼 생활을 아버님과 해로하시며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덕을 많이 쌓으시고 세상을 이겨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사셨던 어머니는 하늘나라에서도 마음이 평안하실 것을 나는 믿는다.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라고 하니 많이 당황했다.
나에게는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두 어머니가 있다.
한 분은 낳아 주신 어머니, 다른 한 분은 길러 주신 어머니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해마다 아들을 생산했는데 네 번째 아들을 낳은 후 2년을 누워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다만 "엄마가 계신 방에 들어가면 안 돼" 하는 한마디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새 어머니가 우리집에 오신 것은 막내가 세 살, 나는 일곱 살 때인 것 같다.
사십이 가까운 처녀가 애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서울 양반집에 첫 시집을 오신 것이다.
새 어머니는 부지런하시고 말이 없으시며 정성껏 우리들을 돌보아 주셨던 모습이 어머니의 기억이다.
북악산에 눈이 녹고 청계천에 얼음이 녹아 개울물이 맑아지면 무거운 빨래짐을 머리 위에 지시고 이웃집 아주머니와 흘러내리는 개울물에서 많은 빨래를 하셨다.
휭휭 찬바람이 부는 긴 겨울밤에는 애들이 명절에 입을 솜이 두툼한 바지와 저고리를 손수 만들곤 하셨다.
어머니는 초저녁 잠이 많아서 꾸벅 꾸벅 조시다가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면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여러 형제 중에 나는 유난히 요구사항이 많고 성격이 급하고 화내기 잘하며 억지를 잘 부리는 힘든 아들이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밤잠을 설치면서 기워주신 양말을 창피하다고 새 양말을 달라고 억지를 썼다.
새 양말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계속 버티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볼기를 때렸다.
나는 가방을 얼른 들고 집 밖으로 뛰어 나와 학교로 줄행랑을 쳤다.
어머니는 속이 썩는 경험을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해를 거듭하며 겪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힘들게 한 것은 아버지도 한몫했다.
아버지는 완고한 유교 집 안의 장손으로 남존여비의 사상이 머리에 굳게 박힌 분이다.
남편은 하늘이고 아들이 딸보다 귀하다고 고지식하게 믿는 힘든 남편이었다.
아버지와 다른 의견을 표시하거나 불평을 말해서는 큰일난다.
그런 속에서도 어머니는 모든 것을 참고 불평을 접어두고 말없이 사신 분이었다
우리 집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우리는 "새" 엄마를 "엄마"라고 불렀다.
그 분은 새 엄마가 아니다, 세상은 우리를 낳아주신 분으로 알아야 했다.
그것은 엄마의 체면을 지켜주고 우리도 당당한 엄마가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세상을 향한 연극이다.
그것은 우리 체면문화가 가르쳐 준 유산물이기도 하다.
밖에서 보면 엄마는 정성껏 아이들을 먹여 주고 입혀주고 키워주는 훌륭한 어머니시다.
그러면 집안에서의 사실은 어떠했을까?
누가 가르쳐 주었는지는 몰라도 애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새 엄마도 엄마다. 하지만 진작 나를 낳아주신 엄마가 진짜 엄마다"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특별히 어린 시절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그 생각을 잘 써먹었을 것이다.
그러면 엄마는 그것을 알까?
물론이겠지!
그 때마다 엄마는 많이 힘들었겠지.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한 사건을 내가 저질렀다.
부모님을 미국에 오시도록 초빙을 했는데 비행기표를 보낼 때 거기에는 한 장 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항상 말씀이 없는 어머님은 여전히 말씀이 없으셨고 잔소리를 많이 하시고 소리를 잘 지르시던 아버지도 이번에는 말씀이 없으셨다.
그리고 그 비행기표는 다시 돌아왔다.
내 애들을 키우고 그것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는 배신의 아픔을 겪으셨을 것이고 아버지는 자식을 잘못 길렀구나 하는 후회를 하셨을 것이다.
40년이 넘는 옛날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도 자다가도 그 일을 생각하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난다.
꽃이 피는 봄철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간 기억이 난다.
그 힘든 세월 어머니는 부처님을 의지하고 사신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어머님의 마음에는 부처님의 평안이 있었다.
화내는 일도 우리들을 핀잔하는 일도 없었다.
손님을 정성껏 모시며 며느리를 상전 같이 받드는 시어머니를 나는 목격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에 막내 여동생을 얻게 된 것은 분명히 부처님이 어머니에게 주신 선물이었다.
그 딸은 우리가 줄 수 없는 기쁨을 어머니에게 주었을 것이다.
하루의 삶이 힘들고 육신과 마음이 지칠지라도 그 딸을 보면서 위로를 받으시고 기쁨이 넘쳤을 것이다.
나는 어머님에게 빚진 자임을 절실히 느낀다.
막내 여동생을 볼 때 오빠로서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 초기엔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그래도 노년 길에 어머님은 50년 결혼 생활을 아버님과 해로하시며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덕을 많이 쌓으시고 세상을 이겨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사셨던 어머니는 하늘나라에서도 마음이 평안하실 것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