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에서 홀로 50명 이상의 중공군을 사살해 한·미 양국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은 일본계 미국인 미야무라 히로시(97) 예비역 하사가 별세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30일 미 의회 명예 훈장 협회를 인용해 미야무라 하사가 전날 아리조나주 피닉스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고인은 한국전 참전 용사 중 가장 눈에 띄는 전공을 올린 인물로 평가된다.
잘 알려진 항전으로는 1951년 4월 24일 밤 중공군의 기습 공격에 홀로 맞선 일이다.
당시 상병 계급의 분대장이었던 그는 연천군 대전리 인근에서 전초기지를 지키던 중이었다.
중공군의 야간 공격이 쏟아졌고 동료들은 하나둘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미야무라 하사는 분대원들의 이송을 지시한 후 홀로 남아 싸움을 이어갔다.
그는 소총에 총검을 장착한 뒤 적진에 뛰어들었고, 한밤 시야 확보가 어려운 점을 틈타 중공군 10명을 사살했다.
진지로 복귀한 뒤에도 기관총·라이플·수류탄 등으로 더 많은 적을 없앴다.
미 의회 명예훈장 공적서에는 ‘미야무라 하사는 탄약이 고갈되기 전까지 50명 이상의 적을 죽였다’ ‘마지막까지 압도적인 수의 적군과 싸우고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당시 미야무라 하사는 수류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고 적군에게 발각됐다.
이후 28개월 동안 중공군에 잡혀 기아 등에 시달렸고, 한때 행방불명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휴전 한 달여 만인 1953년 8월 20일 미군 포로 중 한 명으로 석방됐다.
그해 10월 미야무라 하사는 참전 때의 공로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의회 명예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이미 그가 체포된 지 8개월 후인 1951년 12월에 수여됐으나, 미 육군은 중공군이 해코지할 것을 우려해 공개하지 않았었다.
한국 정부는 2014년 미야무라 하사를 초청해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미야무라 하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석방 후 훈장 수여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뭐라고?’ 뿐이었다”며 “나는 내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내 부하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난 내가 영웅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1925년 뉴멕시코주 탄광촌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일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동차 정비사로 일했다.
그의 손녀는 미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리노이주 공군 기지에서 장교로 복무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