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 무슨 뜻인가? 다윈의 진화론에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예전에 일하던 학교에서는 좀 다른 뜻으로 쓰였다.
함께 일하는 지구인 중에 구호 만들기를 잘하는 선생님이 계셨다. 학생들에게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기억하기 좋으라고 '적아야 산다 즉 적자생존!' 이렇게 외치곤 하셨다. 요즘 내가 일하는 교실에서는 '적자생존'을 실감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무엇이든지 기록한다.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때마다 화장실 벽에 있는 표에 날짜, 시간, 아이 이름, 기저귀를 간 어른 이름,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등등을 상세하게 기록하도록 되어있다.
아이들끼리 싸우게 되면 또는 떼를 쓰거나 선생님 말을 안 듣고 소란을 피우면 그것도 자세히 적게끔 되어있다. 출석부도 2개나 있고, 초등학교의 경우, 오전, 오후 이렇게 2번씩이나 출석체크를 하여 보고 하게끔 되어있다.
당연히 특수교육을 받는 학생들을 일대일로 개인지도 할 때에는 어떤 활동을 몇 분간 어떻게 지도했고, 학생은 얼마만큼 반응을 보였는지 매번 기록하고 있다.
교실 여기저기에 벽마다 볼펜과 기록표가 붙어 있어 선생님과 보조 교사들은 수시로 학생들에 관해 기록을 남긴다.
요즘 빅 데이터가 뜨고 있는 분야라고 하는데, 빅 데이터의 시작이 바로 미국의 교실임을 깨닫게 된다.
학습부진아들과 특수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매일 학교에서 하는 컴퓨터 수학, 영어 소프트웨어는 개개인별로 진도와 학습성과를 저장하고 통계를 내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학생들이 매일 그 프로그램에 개인별 아이디를 입력하여 접속하게 되면 학생들의 개인별 학습량과 학습성과가 기록되고 교사는 언제든지 그것을 확인하고 학습에 반영할 수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기록을 통해 학생들의 학습상황이나 실력에 대한 데이터가 수집이 되고, 데이터 수집을 통해 그들의 경향성이나 패턴을 파악하게 되며 패턴이나 경향성의 파악은 마침내 각종 표준화 검사나 특정한 이론이나 규칙의 도출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내가 느낀 미국 지구인들의 놀라움을 말로 표현하다 보니 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즉 학생들에게 '읽기'를 지도할 때, 학생들이 읽는 모습을 보고 잘 읽는다. 더듬거린다. 전혀 못 읽는다라고 느끼며 지도할 수 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수업시간에 번호대로 학생들에게 교과서 읽기를 시켜보고 읽는 정도를 대충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곳 ESL 수업을 참관해 보니, 학년별로 1분에 몇 단어를 읽는지, 읽는 동안 몇 개의 단어를 더듬거리는지를 매달 체크하고 기록하여 학생들의 읽기 향상 정도를 파악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예전에 한국 지구인들이 체력장을 하며 각 종목별로 기준 횟수와 점수가 있는 것처럼, 소리내어 읽기에 학년별 기준표가 있고 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매주 확인하고 기록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요즘 나는 특수교육의 집문서 또는 계약서 같은 역할을 하는 "개별화 교육안(Individual Education Plan)"을 작성하고 있다.
학생 한 명이 전학 올 때마다 개별화 교육안을 작성해야 한다.
이것을 작성해야만 특수반에서 교육을 받으며 각종 테라피와 보충 교육을 "무상"으로 받을 수 있다.
전학생이 다니던 전 학교에서 그 학생에 관한 각종 서류가 넘어오면 우선 그 서류를 보고 개별화 교육안 초안을 작성하여 부모님과 여러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개별화 교육안을 완성하게 된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놀라는 것은 학생에 대한 상세하고 방대한 기록이 빠짐없이 다음 학교로 넘겨 진다는 것이다.
전 학교에서 보내 준 자료를 통해 나는 학생을 육안으로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머릿속에 이 학생을 위한 지도 방향을 대충이나마 설계 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자료의 내용들이 즉 데이터들이 두루뭉실하고 소설적인 것이 아니라 각종 표준화 된 검사 결과를 기록하거나 매우 구체적으로 수량화 되어 있는 것이어서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지 헷갈리지 않고 알 수 있었다.
좀 딱딱하고 정 없어 보이지만 학생에 대한 기록을 남길 때 "화를 잘 낸다" "의기소침하다" "내성적이다"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지능검사 결과 IQ가 130, **판 유아 심리검사 2016년 판 결과 산만함 78점, 우울감 60점, 신체화지수 90점임"이라고 적는 것이 그 학생을 위한 다음 단계의 교육 프로그램을 계획 할 때 휠씬 도움이 된다.
예전에 일하던 학교에 입학하려는 학생이 아무래도 특수 교육을 받아야 하는 학생인 것 같아 부모님께 소아과나 정신과에 가서 진단서를 받아 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받아 오신 진단서의 내용이 너무 두루뭉실하고 소설 읽는 것 같아서 같은 학년 선생님들끼리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대체 이 학생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가늠하느라 혼란스러워 했던 일이 있었다.
계속 적고, 축적하고 점검하고 그래서 패턴을 알아내야 발전한다. 이것이 미국 지구인들의 강점임을 요즘 무척이나 깨닫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헐렁하고 허술하지만 은밀하게 기록하고 또 기록하는 미국 지구인들!
요즘 나는 집에서도 적자생존을 시작했다. 아이들의 '집안일 하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꾸준하지는 못하지만 '나의 할 일' 표를 만들어 나의 할 일들-성경쓰기, 기도, 영어공부, 운동, 청소 등등 -을 기록해 나가고 있다.
우리 모두 적자생존!
이메일 namenoshi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