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살다가 미국에서 사니 좋은 점이 한가지 있다. 처음에는 불편한 점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점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바로, 미국에서는 하루에 중요한 일 한가지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미국에서는 멀티테스킹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하루에 병원가서 건강 검진하고 운전면허 갱신하고, 미장원에서 머리를 하기가 한국처럼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볼일을 다 보고, 일본에 가서 당일치기로 우동을 먹고 오는 젊은이들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살 때는 이러한 상황이 매우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하루에 많은 일을 하면 할수록 능력 있는 인간이 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빨리 신속하게 되는 것이 좋은 것이라 여겼다. 쾌속, 급속, 스피드, 총알배달 심지어 변비약 선전에도 쾌변이 등장하는 이러한 분위기가 세련되고 앞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미국에 오니,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는 하루에 한가지 일을 하는 것도 벅차다. 때론 답답하고 일처리 하는 사람들이 게으르고 멍청하게 느껴지기 까지 하였다. 감기로 병원에 가면 1-2시간 기다리는 것은 예사이고, 어디를 가나 예약은 필수이며 영업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끝나는지. 24시간 운영하는 가게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으며 서류를 준비하려고 관청에 가면 서류 신청 후 한달 정도 기다리는 것을 예사로 이야기한다. 심지어 라식이나 라섹 수술 조차도 한국에서는 이틀에 양쪽 눈을 다 수술해 주는데, 이곳 미국에서는 한달이나 걸린다는 흉흉한 루머가 떠돌고 있으니 황당하고 갑갑하기 그지 없었다.
이곳 느림보 거북이들의 나라에서 살다보니 나도 점차 '하루에 한 개만!'의 분위기에 적응해 갔다. 적응해 가면서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성취와 성공을 쫓는 삶에서 이제는 의미와 쉼을 추구하는 삶으로 좌표 이동 중이다. 뭔가 좋은 것을 많이 더 빨리 성취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나에게 주어지는 한 두 가지 일에 집중하며 그 일들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에서 살 때, 나의 별명은 덜렁이였다. 뭔가 그럴싸하게 일을 해 내는 것 같은데, 꼭 한 두 개씩 실수를 저지르고 구멍을 만드는 '한 구멍'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혹시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성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곤 했었다.
며칠 전, ADHD에 관한 글을 읽다가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ADHD란 쉽게 말해 병적인 '주의산만'을 말한다. ADHD는 크게 주의력 부족과 충동성, 과잉행동의 특징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ADHD가 있다는 사람들을 보면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는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기에 이것에 과연 주의력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들게 만든다. 요즘 전문가들은 ADHD를 지닌 사람들은 주의력이 짧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들에 다 집중을 하고 모든 자극에 다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는 관점을 말한다. 즉 주의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대해 일일이 주의를 기울이는 성향을 절제하고 차단하는 기능이 부족한 것,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무수히 많은 아이디어들을 차단하는 절제력이 부족한 것이라는 관점으로 이야기한다. 이것을 억제력의 결핍(a deficiency of inhibition)이라고 말한다.
이제야 내가 왜 '한구멍' 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억제력 즉 절제력이 부족해서였다. 많은 일들을 몽땅 그리고 빨리 하려고 이리저리 산만하게 뛰다 보니 결국 구멍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온갖 좋다는 교육방법과 프로그램들을 이것 저것 해보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바쁘기만 했고 깔끔하게 끝마무리를 한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어디선가 좋다는 것이 있으면 귀가 솔깃해서 절제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이것 저것 몸만 힘들게 하다 말다 반복을 했던 것 같다.
나에게 부족한 억제력을 생기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ADHD 관련 글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방법이 제시되어 있었다. 먼저 주변에 신경 쓰이는 것을 정리하라, 앞자리에 앉아라,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선적으로 말하라, 짧게 짧게 말하라, 중요한 단어에 밑줄 쳐라, 에어로빅과 같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운동을 하라, 공책은 한 가지로 통일해라(물건을 잘 잃어버리므로 공책 하나에 모든 학습내용을 쓰라는 뜻), 항상 시간이 더 걸릴 것을 염두에 두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 등등이다. 물론 이 방법들은 ADHD 증상을 지닌 학생들을 위한 방법이다. 이 방법들이 신기하게도 미국의 라이프 스타일에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미국 생활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시간과 돈이 별로 없어 집안에 살림이 별로 없고 아주 단촐한 환경이다. 관심을 끌 만한 살림이 전혀 없다.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항상 앞자리에 앉게 되고 부족한 어휘 탓에 항상 직선적으로, 짧게 짧게 말하게 되며 상대방도 내가 외국인임을 감안하여 그렇게 말한다.생활 속에 별 이벤트가 없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저절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아직 에어로빅은 못하고 있지만 조만간 운동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과연 나는 '한구멍'에서 '한집중'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기대된다. 일상에서 오는 수많은 자극과 좋아 보이는 것들을 억제하고 한 두가지를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삶을 이어 나가고 싶다. 나의 미국 라이프 스타일을 통해 이제는 많이 보다는 깊이, 성공 보다는 열매를 기대하는 삶이 이루어지길 희망해 본다.
* 책 소개: ADHD, 학습장애, 자폐증, 튜렛 증후군, 우울증 등에 관해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대처법을 제시한 책이 있기에 소개합니다. 이러한 증상에 사용되는 약에 대한 설명도 있어 집에 두고 궁금할 때마다 들춰보면 유용합니다. Martin. L. (2014). Kids in the syndrome mix of ADHD, LD, autism spectrum, tourette's, anxiety, and more! (2nd ed). Philadelphia, PA: Jessica Kingsley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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