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불법 이민자를 즉각 추방하는 규정이 12일 자정 이후 폐지되면서 ‘규제 공백기’를 틈타 미국에 입국하려는 이민자 수만 명이 미국·멕시코 국경에 몰려드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고 주요 언론들이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1일 저녁 아리조나와 텍사스의 멕시코 국경 지대엔 미 영토로 진입하려는 많은 이민자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미 관세국경보호국(CBP)은 최근 며칠 새 미 국경 지대에서 불법 입국을 시도한 2만8000명이 이민자 보호소에 구금돼 있다고 밝혔다.
국경순찰대는 9일 하루에만 1만명 가량의 불법 월경을 막았다.
이는 3월 대비 두 배로 늘어난 수준이라고 AP 통신은 당국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이 같은 ‘이민자 대란’이 빚어진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 전임 행정부가 2020년 코로나 방역 조치의 일환으로 이민자들을 즉각 추방할 수 있도록 규정한 ‘42호 정책(Title 42)’이 12일 사라진다는 기대감이 작용했다.
42호 정책은 공중 보건상 이유라는 명목과 달리 실제로는 이민자 유입을 막으려는 트럼프 정부의 의도가 담긴 조치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2020년 3월 이후 42호를 근거로 추방된 인원은 280만 명에 달했다.
그런데 바이든 행정부가 코로나 비상사태를 12일 자정에 해제할 거라고 발표한 뒤 소셜 미디어(SNS)에서 ‘42호도 폐지된다’는 이민 브로커들의 홍보 게시물이 급속히 확산됐다.
그러자 “42호 폐지 후 새로운 이민 규제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서둘러 입국해야 한다”고 판단한 이민자들이 대거 국경으로 몰려든 것이다.
이에 대해 바이든 정부는 “규제 공백은 없다. 42호가 폐지된다고 국경이 개방되는 게 아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기존에 있던 ‘8호 정책’을 대신 적용하겠다는 방침이라고 한다.
NYT에 따르면 국경에서 이민 신청을 할 수 있는 8호 정책은 온라인으로 이민 신청을 사전에 해야 하고, 미국 내 재정 후원자를 확보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알레한드로 마요르카스 국토안보부 장관은 브리핑에서 “12일 밤이 지나도 미국 국경은 개방되지 않는다. 이민 브로커의 거짓말을 믿고 당신의 생명과 재산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는 “합법적인 경로를 통하지 않으면 이민 자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면서 “상습범으로 분류되면 미국에 5년 간 재입국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NYT는 최근 불법 이민자가 급증한 데는 베네수엘라·콜롬비아·니카라과 등 중남미 국가들의 정치 불안정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미 공화당이 “국경 강화를 위한 새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히면서 이민자 정책이 내년 대선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반대로 42호 정책 종료로 인한 이주자 증가가 여전히 높은 미 인플레이션 완화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는 코로나 대유행 기간 시작된 인력난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임금 인상이 인플레이션을 악화시켜 왔다.
그런데 이주자가 늘어 구인난이 해소되면 물가 상승률이 진정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미국은 접경 지역 관리를 위해 국경순찰대원 2만4000명 외에 미군, 비밀 경호국 요원, 법원 집행관 등 수천명을 추가 투입했다.
CNN은 “국토안보부 인원 1400여 명, 국방부 인원 1500명, 미군 550명과 망명심사관 약 1000명이 지원을 위해 파견됐다”고 전했다.
멕시코 역시 북부 국경 주변에 이민청과 국가 방위대 인력을 증편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긴장하는 아리조나, 연방정부 정책 비판하며 지원 강화 요구
미국 국경 도시들은 물밀듯이 밀려드는 이민자 행렬에 이미 허덕이는 상황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짚었다.
아리조나주 국경도시인 유마와 노갈레스는 통제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다.
더글러스 니콜스 아리조나주 유마시 시장(공화당)은 국경 지역의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 대응할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며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국가 비상사태 선포를 촉구했다.
그는 지난 한 달 사이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어 유마시에 유입되는 이민자의 수가 하루 300명 안팎에서 1천명 이상으로 급증했다면서, 연방 차원의 자금 지원이 없는 현 상황은 법 집행 당국과 지원 단체, 의료기관 모두에 과도한 부담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마 한 병원의 경우 작년 한 해에만 약 30만 명의 불법이민자를 치료하느라 2600만 달러 가량의 빚을 떠안은 것으로 전해졌다.
니콜스 시장은 이어 대피소가 없는 유마에서는 몰려드는 이민자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낼 수 있는 교통이 최우선 해결 과제라고 말했다.
니콜스 시장은 국경 순찰대가 이민자들을 거리로 내보내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루 2000대 가까운 차량이 멕시코로부터 들어오는 노갈레스 또한 급작스럽게 증가할 이민자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연방 마약 단속국은 작년에 아리조나주에서만 2200만 개 이상의 펜타닐 알약을 압수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미 전국 총량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양이며, 마약 카르텔의 미국 주요 진입 지점이 바로 노갈레스다.
멕시코의 시날로아 마약 카르텔은 아리조나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마약을 유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조, 운송, 판매가 쉬워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펜타닐 알약이 대량으로 미국으로 들어오고 있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대거 유입될 가능성이 높아진 이민자들 관리까지, 국경순찰대 요원들의 업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과중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마리코파, 야바파이, 피날 카운티의 셰리프 국장들은 지난 10일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아리조나 주민들과 미국민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의 강력한 조치를 촉구했다.
마리코파 카운티 폴 펜존 셰리프 국장은 “국경에서의 불법 이민 문제를 바이든 행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이를 지역문제로 만들었다”고 지적하며 “연방정부가 법을 집행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아리조나주가 집행하겠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민주당 소속인 케이티 홉스 아리조나 주지사까지도 이민자 이슈에 대해 소극적인 바이든 행정부에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5월 9일 기자회견에서 홉스 주지사는 국경 보안 기금에서 700만 달러를 사용해 운송을 위한 주 예산 1500만 달러와 함께 운영을 확장할 계획을 밝혔다.
홉스 주지사는 바이든 대통령과 알레한드로 마요르카스 연방 국토안보부 장관에게 지역단체와 지역사회가 더 이상 이민자 처리 책임을 떠맡을 수 없으며 연방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 연방정부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홉스 주지사는 더그 듀시 전 주지사가 해온 것처럼 월경한 이민자들을 다른 주로 이송하는 프로그램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는 한편 국경 문제 해결과 이민자 보호소 운영에 대한 긴급 자금 지원 계획도 내놨다.
한편 공화당이 주도하는 연방하원이 불법 입국자 즉각 추방정책 종료 직전에 멕시코와 맞닿은 미 남서쪽 국경 보안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처리했다.
하원은 11일 본회의에서 남서부 국경 보안을 강화하고 국경을 넘기 이전 망명을 신청해야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찬성 219표, 반대 213표로 가결했다.
법안은 망명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멕시코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남부 국경에 불법 입국을 막기 위한 장벽 건설을 재개하도록 명시했다.
이번 표결에서 민주당 의원 전원은 반대표를 던졌다.
연방상원은 민주당이 다수당을 점하고 있어 해당 법안이 처리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거부권 행사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상원에서는 이미 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이 된 아리조나주의 커스틴 시네마 연방상원의원이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42호 정책의 2년 유지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시네마 의원은 하원 표결 직전 "공화당 표결이 국경 뿐 아니라 미국의 전반적인 이민 문제를 개혁할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리조나주의 또다른 연방상원의원인 마크 켈리도 민주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42호 정책의 연장 및 유지에 대해서는 시네마 의원과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