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에 걸린 사람과 그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풍병은 30대 이후, 보통은 40대 중반 이후에 일어납니다. 마가복음의 중풍병자는 그래서 아마 40대 초반까지는 정상인으로 잘 살았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스트록(stroke)을 맞았습니다.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만 누워 살아야 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먹여주어야 했고, 옷 갈아 입혀주고, 욕창에 걸리지 않게 씻어주어야 했고, 목욕시켜주고, 대변 소변 다 처리해주어야 했습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지킬 수 없는 불행한 삶이었습니다. 부인이 해주었는지, 자식들이 해주었는지, 부모가 해주었는지,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경제적인 것은 말할 것 없었을 것입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자가 그렇게 되었으니 그 자신이나 가정이나, 만일 가정이 있었다면요, 참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난과 참혹함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재활 시설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고, 간단한 치료조차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저 평생 길에 눕혀진 채 거지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 몇 닢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어야 할 것입니다.
이따금 꿈도 꾸었겠지요.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며 걷고 뛰고 아이들과 손잡고 즐겁게 노는 꿈을.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면,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도, 걸어갈 수도 없이, 천정만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미이라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저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 나무 판대기 침상이 그가 경험할 수 있는 온 세상이었고, 거기에 눕혀진 채 감옥보다 더한 칠흑 같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돈도 없고 직업도 없고 영향력도 없고, 가정도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미래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겠죠.
그러나 그에게 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돈도 없고 직업도 없고 명예도 없었지만, 그에게 한 가지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친구들. 자존심마저 주장할 수 없었던 완전히 황폐화된 그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함께 아파해주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웃어 줄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중풍을 맞기 전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에게 이런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아마 건강했을 때 사람들과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침상 네 귀퉁이를 들고 있는 친구 4명과 또 침상을 지붕으로 올리는 과정에서 함께 도왔을 다른 친구들을 모두 합친다면 아마 7명 내지 8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중풍병자에게 중풍병은 사람들과 관계를 단절시키는 벽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권에서 육체에 결함이 있는 아이들은 보통 방치되어 내버려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형아를 키우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정하라"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로마에서는 "기형아를 즉시 죽이라"는 성문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유대 사회에서도 신체 불구자들은 하나님이 저주한 사람들로 치부되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중풍병자를 가까이 하고 친구로 삼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이런 모든 법적 종교적 장애물들에 굴하지 않고 친구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친하다'는 것과 '친구'는 의미가 다릅니다. 친한 사람 또는 친절한 사람이라고 해서 꼭 친구라고 할 수는 없지요.
'저 사람과 친한 사이야, 친해'라는 것과 '쟤는 나의 친구야'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친한 관계, 친절한 사람은 언제든 상대가 불친절하게 나오거나 또는 과도한 희생이 요구되면 가차 없이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더 이상 이용 가치가 떨어지거나 거래가 끝나면 멀어지죠. 주고 받는 관계이고, 준 만큼 돌아올 것을 계산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우정 또는 친구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계속 주기만 해도 괜찮습니다. 돌아오는 것 하나 없어도 그저 주는 것에서 기쁨을 얻고 만족합니다. 그것이 우정이고 친구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예수님이 마을에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친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이니 같이 만나 일찍 가자, 서로 약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입을 엽니다. '아니야, 우리만 갈 수는 없어. 우리 친구도 침상 채 들고 가자. 그에게 큰 힘이 될 거야. 혹시 알아? 소문이 정말 사실일지. 예수가 우리 친구를 고쳐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어. 꼭 그를 데리고 가자!'
몸이 불편한 중풍병 친구를 데려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고생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친구 걱정뿐이었습니다.
러시아 태생의 심리학자 유리 브론펜브레너(Uri Bronfenbrenner)는 가족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가족이란 "구성원의 행복을 위해 비이성적으로 헌신하는 그룹."
계산하고 앞뒤 재는 것은 이성적이지만 친구는 아닙니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의 행복에만 몰두하여 비이성적이 됩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