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우리집에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지구인 가족이 놀러 왔다.
일년 반 전에 미국으로 취직이 되어, 온 가족이 미국으로 오게 되었는데, 앞으로 미국에 눌러앉을 생각이란다.
아무래도 올망졸망한 아이 셋을 키우기에는 미국이 한국 보다 더 나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작용한 듯 싶다.
휴가를 이용하여 자동차로 미국 중서부 횡단을 하는 중에 우리집에 들른 것이었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들의 대화는 모든 한국 지구인들의 공통 관심사인 '교육'에 이르렀다.
특히 미국에서 살면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한국어를 잊지 않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미국에 사는 한국 출신 지구인이라면 한번쯤 고민 해 보았을 문제다.
나 또한 한국말이 점점 어눌해 가는 우리집 아이들을 보며 한숨이 나온다.
내가 기대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무엇일까?
완벽한 한국인이면서 미국 사회에 승승장구하면서 완전히 적응된 그런 모습인가?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완전한 한국인이면서 완전한 미국인이라는 것이 말이다.
반가운 손님이 떠나고 난 후에도 난 이 문제로 계속 고민했다.
바로 다음 세대의 정체성 말이다.
그러다가 TV에서 우연히 '그레이스 린(Grace Lin)'이라는 유명한 동양계 동화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레이스는 뉴욕에서 자란 중국계 미국인이다.
다들 알겠지만 중국계 미국인들의 높은 교육열과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한국 출신들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다.
그들도 미국에 사는 한국 지구인들처럼 자녀들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 하다.
많은 중국 출신 지구인들이 그레이스에게 "어떻게 하면 미국에 사는 우리 자녀들을 중국인으로 키울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 한단다.
이 질문에 그레이스는 "당신의 자녀는 절대 중국인이 될 수 없을 겁니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이 아이들은 항상 중국계 미국인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문화와 정체성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참 힘들 것입니다. 저 또한 이 문제를 공감하기에 동화책을 쓰게 되었답니다. 고유의 문화와 전통은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속하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그러나 문화와 전통을 결코 변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 시간과 타문화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으로 제한한다면 우리는 좁은 세계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유연하고 변화 무쌍한 현재의 문화 대신 과거의 기억 속에 문화, 석고화 된 전통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문화를 매달리고 지켜야 할 보물로 생각하기 보다는 가꾸고 보살펴야 할 씨앗으로 생각해 봅시다. 문화는 존중하고 존경해야 하지만 시간과 환경에 적응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해 봅시다."
그레이스의 대답이 나의 고민에 약간의 해답을 주었다.
우선 나의 아이들은 내가 원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면서 미국인들과 스스럼 없이 지낼 수 있는 지구인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의 아이들은 기대와는 달리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제 3의 지구인, 그러니까 한국계 미국인이 될 것이다.
그레이스의 말처럼, 우리들이 60년대나 70년대 한국 드라마에서나 보던 예의 바른 청년의 모습, 유창한 한국어 존대말을 구사하는 아이들을 기대한다면 분명 실망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미국문화, 꼬집어 말하자면 주류 백인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어 부모에게 "You"를 남발하며 동등한 입장으로 대화를 요청한다면 우리 한국 지구인들은 미국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당황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기대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아이들이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를 잘 버무려 새롭고 매력적인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닐까?
이 아이들이야 말로 한국, 미국, 중국 등 특정 지역에 갇히지 않고 지구 전체를 자기들의 구역 삼아 활동하는 진정한 지구인으로 성장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문화는 절대 불변의 보물이라기 보다는 정성껏 가꾸어 나가야 할 씨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