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짐으로 여기며 '읽어야 하는데 …' 했던 책이 있었습니다.
작년 초부터, 그러니까 거의 2년이 다 가도록 숙제를 내지 못한 학생처럼 부담을 주던 책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책 『담론』입니다.
한국의 성공회 대학교 교수였지만 기독교 신앙이 있으셨던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래 전 그분의 첫 번째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은 후 그분에게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분이 저술한 책은 말할 것 없고 번역한 책, 신문 칼럼, 인터넷 블로그 등 거의 모든 글들을 읽으며 마음의 스승으로 삼아왔습니다.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도 '신영복을 넘지 않으면 참된 목회자가 될 수 없다'는 각오로 그분의 책들과 다른 인문학 책들을 섭렵 정도는 아니지만 할 수 있는 한 많이 읽었습니다.
심지어 부족한 나에게도 안식년이란 기간이 주어진다면 한국에 가서 신영복 선생의 강좌를 한 학기 들어야겠다 소망하며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아쉽게도 신영복 선생은 작년 1월 좀 이른 나이라 할 수 있는 70 중반에 작고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가신 책이 『담론』입니다.
작년 봄 한국에서 오시는 동료 목사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후 부분 부분 읽었는데, 며칠 전부터 숙제 끝내는 심정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 중국 고전들을 관계론의 관점으로 풀어낸 책입니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 『담론』을 읽어가며 느끼는 점들을 컬럼에 담을까 합니다.
오늘은 앞부분에 나오는 『시경(詩經)』과 『 초사(楚辭)』등 중국 시에 대한 것입니다.
귀곡자(鬼谷子)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를 끌었습니다.
귀곡이라고 해서 귀신이 연상되며 실제 인물이 아닌 것으로 착각되는데 실제 인물입니다.
전국시대 외교 전문가 그룹을 '종횡가'라 이름했는데, 그들 중 유명한 사람이 장의(張儀)와 소진(蘇秦)입니다.
귀곡자는 이들의 스승이라 기록된 인물로 기원전 350년 경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종횡가들은 보통 전국시대 '신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각국의 정치, 경제, 군사 현황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각국 군주들과 상담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귀곡자는 이런 사람들의 스승이었습니다.
이 귀곡자가 시(詩)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외교를 하는 사람은 흔히 현실주의자이고 전략가라고 치부됩니다.
시 얘기는 하지 않을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귀곡자는 시 얘기를 합니다.
"병법은 병사의 배치이고, 시는 언어의 배치이다."
귀곡자가 한 말입니다.
병사의 배치가 병법에서 중요하다면 시에서는 언어의 배치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말은 듣는 상대가 기뻐해야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언어의 배치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담론』 55쪽에 귀곡자를 이야기 하며 신영복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귀곡자는 언어를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성(誠)이라고 했습니다."
늘 말을 해야 하는 저 같은 사람이 꼭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인품과 체온이 담긴 언어, 언술(言述)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