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 씨의 <흑산>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합니다.
전라남도 무안에서 배로 1시간 여 떨어져 있는 섬 흑산도를 배경으로, 조선조 말 천주교가 민중들 사이에서 들풀처럼 번져나갔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소설입니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들어보았을 인물 황사영이라는 젊은 선비가 북경에 거주하고 있던 천주교 주교 구베아에게 보낼 편지를 비단에 써 놓습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이라는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 사건의 발단이지요.
비단에 쓴 편지를 인편으로 중국에 전달하려 하는데, 편지의 내용은 천주교에 대한 조선 왕조의 박해를 극악한 행위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박해를 멈추게 하려면 서양 군함의 파견이 절대 필요하다는 내용입니다.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능지처참을 해도 모자란 대반역죄입니다.
이 편지를 전달할 사람으로 마노리라는, 물론 소설화된 인물인데, 이 젊은이 편에 청나라에 머물고 있던 천주교 주교에게 편지를 전달하려 합니다.
마노리는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의 마부로 다른 어떤 마부보다 말을 잘 다루고 길에도 익숙한 젊은이입니다.
어떤 계기로 마노리가 황사영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천주교를 접하게 됩니다.
황사영은 마노리에게 다음 번 중국에 갈 때는 천주교 예배당 건물 안으로 들어가보라고 합니다.
그 전까지는 예배당 건물을 밖에서는 보았지만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던 마노리였습니다.
황사영의 말대로 다음 번 사신 일행과 동행했을 때 마노리는 북경에 있는 예배당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구베아 주교를 만나게 됩니다.
주교는 마노아에게 영세를 베풀고 요한이라는 이름도 줍니다.
주교는 친필 편지와 자신의 서명이 들어있는 성화 카드 몇 장을 황사영에게 전달하도록 부탁하고 청나라 은화 40냥을 함께 들려줍니다.
당시 일개 마부로서는 상당한 액수였지만, 그러나 모두 위험한 물건들인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발각될 경우 출처를 의심받고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노리는 이것들을 감추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들어옵니다.
당시 북경을 다녀오는 사신 길은 보통 왕복 100일 정도 걸렸답니다.
특히 돌아오는 길은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압록강을 건너면 첫 번 마을 의주에서 며칠을 잘 먹으며 쉬곤 했습니다.
당연히 주막에서 남자들이 성욕을 발산하는 일들이 벌어졌지요.
마노리 역시 성실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남자인지라 한 여인과 밤을 지샙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집어 준 돈이 그만 구베아 주교가 준 은화 하나였습니다.
다음 날 은화는 몇 몇 경로를 거쳐 관가에 들어가게 되었고, 수상히 여긴 의주 부윤이 마노리를 불러들입니다.
소지품을 조사한 결과 천주교 대주교가 준 성화 카드, 친필 편지, 은화 39개가 발각되었습니다.
당시는 한창 천주교를 핍박하던 때로 1801년 신유박해 직전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황사영을 지목했고, 백방으로 그를 찾는 중이었습니다.
마노리는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궁궐에서 직접 심문을 받던 중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황사영이 있는 곳을 발설합니다.
소설이지만 거의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로, 그래서 강원도 산 속 토굴에 숨어 있던 황사영이 잡히게 되고 그가 써놓은 백서가 발각됩니다.
소위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절두산에서 수 백 명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목이 잘리는 신유박해의 단초가 된 사건입니다.
비록 소설이지만 읽으면서, 그때 마노리가 욕정을 절제하고 모든 일을 계획대로 잘 성사시켰다면 어땠을까?
아마 우리 한국 근대사가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소설로 꾸며진 이야기에 대한 저의 상상이었지만, 그러나 신유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죽음이 실제로 몇 몇 초신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또는 변절로 인해 야기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저의 상상이 그다지 틀리지 않은 상상일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 개인의 삶에서는 말할 것 없고, 가정이나 심지어 한 국가의 역사에서도 육체의 욕망이 절제되지 못했을 때 그 결과는 참으로 엄청나다는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