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천성적으로 참 좋은 사람이었지만 두 사람이 근근이 어렵게 사는 환경은 우리 결혼 생활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내의 잘못은 없었다. 다만 나의 부족함과 주변 환경들이 우리를 서로 의지하며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내는 어느 날 짐을 챙겨서 나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를 가장 박대했던 둘째 형님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은 1975년의 일이었다. 둘째 형님은 경찰 공무원으로 일을 했었고 형수는 독일 간호사로 지원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독일 간호 근로자 테이프를 끊은 분이었다. 1960년대 초 박정희 군사 정권은 서독 정부와 계약을 맺고 한국 간호사와 탄광 일꾼을 서독으로 인력 수출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간호사 인력 수출은 현지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 경우가 되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과 서독 간호사 수출 관계를 잘 설명한 감동적인 글이 있어서 옮겨 본다.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
1960년대의 경제 사정을 보면 1인당 GNP 87달러,한국은행의 외화 보유잔고 2,300만 달러, 연간 물가상승률 4.2%, 실업률 23%, 민간저축률 3% 등으로 빈곤 국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런 가운데 5.16이 일어났다. 5 .16을 일으킨 박정희 소장은 이듬해인 1961년 가을 최초의 해외 방문으로 미국을 찾았다. 그러나 미국을 방문한 박 전대통령은 케네디를 위시해서 미국 의회 지도자들로부터 차디찬 냉대를 받고 돌아왔다. 당시 4.19혁명 이후 군인들에 의한 쿠데타 정권을 도와서는 안 된다는 미국 여론의 빗발친 냉소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풍전등화의 어려운 역경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뜻밖에도 서독의 뤄프케 대통령으로부터 공 식 초대를 받는다. "2차 대전 후 폐허가 된 땅에서, 더구나 공산주의 세력과 대치하면서 오늘의 위대한 경제 건설과 번영을 이룩한 서독의 부흥상을 살살이 보고 오겠다"라고 하면서 그는 1964년 12월 6일 독일로 떠났다. 12월 7일 아침 9시 40분 뤄프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수상 등의 영접을 받으며 일행은 독일에 도착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박 대통령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통일의 그날까지 경제 발전을 위해 힘쓸 것을 간곡히 충고했다. 그리고 전폭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박 대통령이 서독 국민들로부터 이처럼 기대 이상으로 크게 환대를 받게 된 것은 이미 1963년부터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들이 현지에서 성실하게 일해 준 덕분이었다. 당시 서독 언론들은 우리나라 간호사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거의 매일같이 대서특필로 소개하였고, 이국만리 타향에 와서 그토록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헌신적인 근무태도를 격찬하고 있었다. 이국 땅 낯선 곳에서 환자들의 아픈 몸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가족처럼 정성껏 간호하는 젊은 여성들의 헌신적인 간호활동은 모든 독일 국민의 가슴 속에 따스한 정을 주었고 '동양의 프로세안'으로 끝없는 칭찬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이미 1960년대 초에 가톨릭 계통의 민간협력 차원에서 취업 알선으로 30명 내외의 간호사가 서독의 병원에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한국 간호사들이 서독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이 독일 정부에까지 알려진 것이었다. 이들 덕분에 한국을 바라보는 서독 국민의 열기는 대단하였고 그 후에는 2억 마르크에 달하는 제2차 경제 원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만일 그 당시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모습이 없었던들 우리는 서독 정부로부터 재정 원조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박 대통령의 방독이 그토록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1964년 12월 8일 아침 10시 55분, 방독 중이던 박 대통령은 뤄프케 서독 대통령의 안내로 루르 지방 광산 도시에 도착해서 수많 은 한국 간호사들과 광부들 앞에 섰다. 고생하는 젊은이들을 위문하고 격려하기 위해 찾아간 박 대통령을 맞아 국민의례가 행해졌다. 애국가를 한 소절 한 소절 부르다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하는 대목에 이르자 어느덧 목멘 소리로 변했다. 간호사들은 손수건을 꺼내기 시작했고, 대통령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고생하는 간호사들과 광부들은 자기 나라 대통령을 보자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간호사 여러분, 광원 여러분,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 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그러나 대통령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장내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끝내는 자신도 울고 말았다. 장내는 눈물 바다로 변했다.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뤄프케 서독 대통령도, 그리고 수행원들도 모두 울었다. 끝내 연설은 중단되었고 박 대통령은 밖으로 나오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간호사들이 줄지어 손을 내밀고 "각하, 손 한 번만 쥐게 해주세요. 우리를 두고 어떻게 떠나십니까?" 하고 목메인 소리로 대통령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일행은 간신히 아우토반에 올랐다. 고속도로의 차 안에서 눈물을 멈추려고 애쓰는 모습을 본 옆자리의 뤄프케 대통령은 "각하, 울지 마십시오.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 부흥을 이룩합시다"라고 위로하며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앞자리에 앉아 칠순의 노(老) 대통령이 40대의 가난한 대통령에게 격려하는 우정어린 대화를 통역하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창밖에 비치는 석양의 황혼길에 철광 산업으로 보이는 한 공장굴뚝에서는 하얀 연기만이 하늘 높이 내뿜고 있었다.>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한 간호사 파독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극동에 위치한 조그마한 나라의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I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둘째 형수님이 바로 그 시대에 한국 경제 발전의 밑바탕이 된 독일 간호사로 자원해서 현지에서 또순이 같이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일했던 장본인이었다. 둘째 형수님은 서독에서 간호사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 본인이 먼저 미국으로 입국한 후 영주권을 받아 둘째 형님과 조카 등 가족 모두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그래서 둘째 형님은 1975년, 그러니까 한국에서 본격적인 미국 이민의 바람이 불기 전에 이미 미국으로 이민 가서 정착 한 초기 이민자인 셈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