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회생활이 그렇게 기쁘고 재미있는 것인 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고 오묘하게 받아들여지며내 영혼을 쪼개고 다스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교회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미국에 온 사람 같았다. 몇 주 동안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도하는 가운 데 아주 선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너는 환난 가운데 늘 감사하고 기뻐하라."
그 음성을 들으면서 지난날 나의 삶이 슬라이드처럼 스쳐갔다. 한국에서 겪었던 수많은 환난과 고통의 순간들이 가시가 되어서 내 몸 곳곳에 화살처럼 박혀 있는 환상을 보았다. 사랑하는 둘째 누님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아픔, 삼청교육대에서 경험한 지옥 훈련의 고통, 그리고 폐병을 앓으면서 거의 매일 한 사발씩 각혈을 토해내던 때의 고통스런 순간들, 자식까지 버리고 나간 아내에 대한 분노, 아이를 구타하는 아내 등등….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슴에 비수처럼 박혀있던 아픔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순간 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온몸을 떨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그 아픔은 한꺼번에 나를 짓눌러 왔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절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같은 말씀을 주셨다.
"너는 환난 가운데 늘 감사하고 기뻐하라."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이 내 마음 가운데서 모든 고통들을 치유해 주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나는 며칠 밤낮을 울면서 뜨겁게 회개의 기도를 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참된 선과 악이 무엇인지 확연하게 구별하는 영적인 분별의 눈을 갖게 되었다. 내 의식 가운데 선과 악이 확실하게 구분되면서 마음 속으로 이제는 더 이상 악의 편에 서지 않아야겠다는 결단을 했다.
기도할 때마다 뜨거운 성령의 체험이 있었다. 수년 전 폐병 3기에서 치유되던 그날 새벽에 내 코를 통해 뭔가 액체 같은 것이 흘러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회개의 기도를 할 때마다 느꼈다. 그것은 환상적인 영적 체험이었다. 성령의 실체가 그렇게 분명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성령의 존재를 잘 믿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매순간 성령님과 교통하고 교제하는 신비하고 뜨거운 경험을 했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면서 직장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교인의 소개로 뉴욕 맨해튼에 있는 봉제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뉴욕 맨해튼 8가에 있는 봉제공장은 미국에 이민온 한인이민자들이면 누구나 한번씩 거쳐가는 코스였다. 미국에 와서 잡은 첫 직장에서 나는 주급150달러씩을 받으면서 열심히 일했다. 직장이라고는 했지만 성령의 불을 남달리 강하게 받은 내게 있어서 직장은 또다른 전도와 예배의 장소였다. 전도를 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내 마음 가운데는 복음을 전하고 불신자들에게 예수를 영접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용광로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일하는 시간 동안 찬송으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마쳤으며, 집에서 맨해튼으로 출근하는 지하철에서도 노방전 도를 시작했다. 영어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성경책을 들고 지하철 안에서 "Jesus Loves you, Believe in Him. He will give you a happy life!"를 외치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씨앗을 뿌리면 거두시는 이는 성령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전도했다. 둘째 누님이 복음을 접하지 못하고 먼저 돌아가신 아픈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나는 더 미친 사람처럼 열심을 내서 전도했던 것 같다. 복음을 듣지 못하과 아니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예수를 영접하지 못했다면 물론 그 영혼도 불쌍하다. 그러나 나중에 천국에 가서 먼저 예수를 믿게 된 자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데 대한 책망을 하나님에게서 듣게 될 것이 공연히 겁나기도 했다. 여러 사람에게 미친 사람 같다는 손가락질도 당했다. 직장에서 전도하다가 램을 맞기도 했다.
"야, 너나 잘 믿어. 나는 필요 없으니까."
"아저씨, 그래도 예수 잘 믿으시고 꼭 천당에 가세요. 아저씨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극성스럽게 전도하면서 알게 모르게 전도의 열매들도 많이 얻게 되었다. 이민 초기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에 미쳐 돌아가는 나를 보고 형님은 당장 나가서 따로 살라고 고함을 지르곤 했다. 그리고 형님 집에 함께 있던 어머님도 근심스런 눈으로 "너는 왜 그렇게 요란하게 예수를 믿냐"라고 하시며 좀 조용히 신앙생활을 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몇 달 정도 형님 집에 얹혀 살던 더부살이 살림을 청산하고 근근이 모은 월급을 가지고 플러싱 인근에 방 하나짜리 아파트를 구해서 이사를 나왔다. 형님이 미국까지 불러 준 것도 고마운데 그 집에서 계속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 미안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자립을 하고 싶었다. 아들 성민이는 어느덧 다섯 살이 되었는데 내가 직장에 있는 동안 돌봐 줄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유치원에 보내기에는 형편이 되질 않아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안정이 될 때까지 한국에 있는 셋째 형 님 집에 아이를 좀 맡겨 놓고, 나는 일하는 시간을 좀더 늘려서 저축을 더 한 후에 아이를 다시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이를 형님 집에 맡겨 놓기 위해 한국에 잠깐 나가 있던 동안 계획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큰 형수가 중매를 서겠으니 사람을 한 번 만나보고 가라는 것이 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다시 이룬다는 것이 아직도 마음 가운데 큰 부담으로 남아 있을 때였다. 그런데도 형수는 상대방 쪽에서 미국 영주권자라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아들이 하나 딸려 있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며 한사코 꼭 만나봐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그 여자 쪽 집안이 돈이 많은 집안이라는 말이었다.
"돈이 많은 부잣집이라고…"
너무도 세상적이고 얄팍한 생각이었지만 나는 그 당시 여자 집안이 부자라는 말에 혹해서 맞선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두어 번 만난 후에 일단 혼인신고를 먼저 하고 미국에 들어가서 초청 절차를 밟기로 약속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이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아들 성민이에게도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고 싶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열심히 교회생활, 전도 활동을 시작하는 등 한국을 방문하기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는 가운데 한순간 성령님의 질책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