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경하할 일
한국산 『오징어 게임』(이하 “오겜”) 9부작 드라마가 넷플릭스 영상 분배 플랫폼을 통해서 방영된지 얼마 안되어 미국과 전 세계 84개국 넷플릭스 서비스 회원국에서 시청률 1위를 점하는 기염을 토한 일로 한국과 전 세계 주요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고, “오겜”에 나오는 여러가지 게임 동작을 모방하는 행위나 여러가지 소품이 온라인 거래상을 통해서 불티나게 팔려나간다는 흥겨운 소식을 접하고 있다. 이런 류의 가히 “열풍”은 대한민국 건국이래 문화예술 분야에서 초유의 사건이며 넷플릭스 회사 경영 역사이래 초유의 일로 기록되면서 조국과 해외에서 열광을 넘어 일종의 신드롬으로 진화하고 있다.
미국에 와서 사는 우리네 재미 한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도 분명 경하하고 즐거워 할 일인 동시에 일면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유감과 우려점이 있어 이 글을 쓰게 된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문화 예술 제작자들의 자유로운 표현이 존중되듯이, 시청자나 독자의 자유로운 비평과 반론권이 보장되는 전제에서 이 글을 쓰게 되는데 이 글의 주된 독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일종의 “참견”인 것을 밝힌다.
“오겜”에 대한 우려점 1: 서구 주도 자본주의 경쟁사회는 그렇게 (드라마가 그리는 대로) 사악한 체제인가?
“오겜”은 서구 주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여러모로 낙오된 인생의 실패자들이 통제된 게임집단에 자의반 타의반 참여하여 그 집단이 진행하는 게임단계를 통과하고 궁극적으로 거액의 상금을 타고자 목숨을 건 경쟁을 치루는 과정을 섬뜻하게, 그러면서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오겜”을 통한 제작자들의 분명한 전달메시지는 명확하게 파악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주인공과 그리고 그 대척점에 서있는 “오일남”으로 불리는 부자 자본가의 마지막 대화를 통해서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한국 모회사 노조원 출신으로 파업에 가담했다가 해고당하면서 직장도 잃고 생계가 막막해 지면서 심지어 어머니의 푼돈까지 끌어들여 경마를 통해서 일확천금을 얻고자 하는 절박한 인생으로 그려진다. 그런 그가 우연히 만난 “오겜” 모집자를 통해서 “오겜” 집단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전개되는 비인간적이며 생명경시의 진행에 반감을 갖고 심지어 그가 최후의 게임 승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탄 상금을 사용하지 않을 뿐더러 “오겜”과 대항하고 전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출하는 것으로 9부작 드라마의 말미를 장식한다.
“오겜”에서 주인공의 대척점에 있는 “오겜” 진행팀과 “오겜”을 관망하는 소위 부자 “VIPs”들은 인간성은 없고 오직 돈만을 알며 그 돈으로 재미를 얻고자 사람 목숨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파렴치한 으로 그려진다. 그대신 주인공은 그런 사악한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한국판 희생자로 그려지며 그런 그가 점진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사악함의 모판인 “오겜” 진행구조에 회의를 느끼고 결국 그런 구조의 전복을 꾀할 것을 선언한다.
여기서 필자의 질문은, “오겜”이 비판하고자 하는 서구 자본주의 체제는 그렇게 사악한 것이며 드라마에서 “선”으로 여겨지는 “휴머니즘”을 발휘하고자 하는 주인공은 진정으로 선한 것인가? 이다. 물론 필자는 서구 중심 자본주의가 전적으로 선하고 다 잘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지구상에 불완전한 인간이 운영하는 이데올로기나 체제가 온전한 것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자본가들의 비인간적인 노동착취나 노동자를 동등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돈벌어주는 기계 혹은 노예로 간주하는 경우 등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겜” 제작자들은 현존하는 정치, 경제 체제 혹은 이데올로기의 경우 그렇게 비판하는 서구 중심 자본주의체제보다 더 잔혹하고 악랄하게 자국민들에 대한 인권말살과 노동착취를 일삼는 권위주의적 전체주의나, 특정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신정국가의 비인간적 만행들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문화예술적 비판의 시도는 생각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썩은 사과 열매 때문에 사과 나무를 통채로 베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서구중심 자본주의의 폐해가 분명히 상존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비판하고 싶은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달콤한 열매를 탐닉하고 있는 대상중에 이번 “오겜” 제작진들도 포함될 것이며, 더구나 권위주의적 전체주의 체제하에서는 상상 조차할 수 없는 자유 언론 표현의 혜택을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누리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필자의 이런 지적은 차라리 “오겜” 드라마 제작자들 보다는 오히려 대중적 광풍에 휘말려 이 드라마속에 녹여진 시대 비판적 메시지에 둔감하고 맹목적으로 시류에 떠내려갈 수도 있는 기독신자들에 대한 일말의 경종이다.
“오징어 게임” (이하 오겜)에 대한 우려 2: 서구문명의 한 축인 기독교는 그렇게 혐오집단인가?
“오겜”에서 전반적으로 제작진들의 기독교에 대한 인상은 부정적이다. 그 한 예는 구슬치기 게임에 등장하는 젊은 두 여인(출소자와 탈북자)의 대화에 녹아있다. 출소자 여인은 개신교 목사의 딸로서 목사인 아버지가 자기 아내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심지어 자신에 대한 성적 폭행에 기인하여 친부살해죄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자이다. 그런 그가 탈북자 여성에게는 무한하며 무조건적인 배려를 베풀고 본인은 장렬하게 죽음을 택한다. 또다른 예는 유리판 징검다리 게임에서 한 참여자가 앞선 게임 참여자들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보고 자신의 생존을 인하여 두손모아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리는 장면에서 위선적인 기독 신자들의 행태를 은연중에 비꼬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최후의 게임 승자가 된 이후에 오겜진행팀에 의하여 사회로 환원하게 되는 데 거기서 마주친 사람 또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간판을 온 몸에 두르고 말로만 전도하며 선행은 없는, 노방 전도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오겜 제작진의 의도는 두가지 일 수 있다: 하나는 일반 대중들이 느낄 법한 혐오스런 기독교인들의 오만 방자한 전도방법에 대한 반감; 다른 하나는 기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라는 배타성에 대한 반감을 담았을 수 있다.
물론, 진리를 외치며 거룩한 공동체로 자천하는 기독교회 지도자들이나 신도들중에 세상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위선적 행동, 무례한 전도행태, 진리를 따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세속적이며 타협적인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그런 기독 신자들의 개별적 혹은 집단적 일탈이 지난 이천년간 전세계적 주류 종교로 발전해 오며 전 세계 다양한 영역에 지대한 긍정적 영향력을 발휘해 온 기독교 자체에 대한 폄훼행위들을 용납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된다.
기독교는 오겜 제작진들의 천박한 종교적 무지와 오해와는 달리 진정한 인간성 회복을 주창하고 실천하는 종교이다. 누가 온 인류의 죄성과 죽음의 철칙에서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피를 흘리며 대신 죽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신은 죄가 없으면서 다른 이들의 절망적 죽음의 상황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이외는 아무도 없음을 감히 증거하는 종교가 기독교인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나 배타적인 선포인 것으로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독선이며 아집으로 느껴 질 수 있다. 하지만 부모로서 내가 낳은 아들과 딸에게 배타적이며 독점적으로 “너를 낳은 것은 나이니 나를 아빠라고 부르거라”는 메시지가 과연 친부의 아들이며 딸인 자식에게 모욕적이며 일방적인 것으로 느껴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자신이 우주보다 선재하며 어느 싯점에 우주와 사람을 창조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 분을 믿고 따를 때 진정한 구원에 이른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종교로서 그것을 과연 아집과 독선으로서만 치부할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이다. 믿는 것은 논증이 필요하지 않은 신념으로서 이것은 단지 각자의 선택일 뿐이다. 종교에 대한 잘못된 전제와 고정관념 그리고 눈쌀 찌푸려지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비행적 행태에 대한 불만과 혐오감 때문에, 진정한 도덕적 탁월성을 견지하는 기독교에 대한 감정적 그리고 대증적 비판과 폄훼행위를 우리는 묵과할 수 없음에 이 글을 쓰게 된다.
심층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눈을 돌리면 지난 이천년간 기독교회의 역사에서, 물론 많은 비행이 없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수한 그리고 무명의 진실된 기독교신자들이 있으며 이름도 빛도 없이 주변에 선행을 베풀고 아낌없이 자신을 나누어 주었던 분들이 있었음을 본다.
120년전 조선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치안이 이루어지지 않은 “위험한 국가”의 부류에 포함되었음에도, 서구 기독교선교사들은 기꺼이 와서 기독교 진리만 전한 것이 아니라 열악한 생활조건을 바꾸어 주고 다양한 서양 문화와 예술 특히 스포츠경기들을 소개해 주었으며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민족의 육적 정신적 고양에 헌신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다. 더구나 일제치하 삼일독립운동의 주동 세력은 바로 기독교였고 극악한 신사참배 강제시책에 분연히 일어나 끝까지 목숨걸고 반대했던 이들도 바로 진실된 기독 신자들이었다. 그리고 해방이후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의 번영의 밑바닥에는 군사안보영역에서 큰 걱정이 필요없는, 기독교인들이 대세인 주한 미군주둔의 공헌을 결코 폄하할 수 없을 것이다.
“오겜”이 자본주의의 체제의 부조리와 배금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경종으로서 드라마를 제작했다면 그 면은 큰 공헌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드라마 전개도중 간간히 삽입된 그러나 매우 의도적인(?) 기독교에 대한 피상적이며 부정적 묘사들은 차라리 장을 달리해서 심층적이면서도 제대로 다루었으면 더욱 좋았을 법하다. 기독교에 대한 정확하지도 않고 표피적 부정묘사로 이미 몇주간 전세계 1억에 육박하는 시청자들에게 왜곡된 메시지를 전한 “오겜”제작진과 넷플릭스 회사의 무지와 무신경의 후과를 우리는 어떻게 어필할 것인가?
윤원환(목사. 피닉스장로교회. 프로비던스 대학교 교무처장)
일부라곤 하지만 실제로 교회를 이끌 자격없는 목사를 양산한 것도 기독교 계이니까.
영화나 드라마 에서 그려지는 것을 부정하고 지적하기보다,
먼저 치열한 반성이 먼저가 되어야 하지 않을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