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아리조나 피닉스 에서 살었을 때의 일이다.
나의 가까운 친지 구 교수는 중국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새벽 세 시에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마음을 추스려 교회를 가게된 것은 몇 달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여전히 머리에 남은, 남편과의 행복했던 추억들이 귀를 막아 목사님의 설교는 허공만 맴돌았고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얼마전 남편을 잃은 같은 처지의 권사님이 옆에 다가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믿음이 모자라서 그래요."라는 권사님의 말은 내 주위의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그말의 의도는 분명 위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구 교수 아내는 거부감과 함께 우럭 화부터 치밀어 올랐다.
구 교수 아내는 다시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순전히 권사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권사님은 자신의 말이 그런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리라곤 예상치 못했겠지만 그런 사려깊지 않은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빈번히 내뱉어진다.
큰 생각 없는 위로는 정작 위로와는 거리가 멀다.
슬픈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뿐이다.
아파하는 사람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될지 모를 때는 차라리 침묵이 금이다.
"정말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면 옆에 조용히 앉아 상대방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는 것이 차라리 한 마디 말보다 낫다.
어려운 분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권사님의 경우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들은 위로나 충고, 또는 조언을 해야할 경우 무엇이 적절한 말인지 잘 배우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각자 나름대로 자라온 배경으로 인해 가지게 되는 편견이 하나의 잣대가 되어 편견에 치우친 조언과 충고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권사님에게는, 나는 그 슬픔을 이겨냈는데?, 라는 나름의 잣대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 생활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모나지 않는, 남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러니까 사회 생활의 필수조건이다.
충고와 조언에 조심하고 평가와 판정(충조평판)을 멀리하며 자기의 편견을 늘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회 생활의 으뜸이다.
충조평판의 유혹을 자제할수 있으면 좋은 이웃 아저씨가 된다.
마음의 아픔과 갈등으로 고통을 받는 이에게 충고나 조언은 금물이라 생각하면 군자의 경지에 이른다.
밤 열시가 넘도록 길거리를 헤매며 집에 돌아가기를 꺼려하는 학생이 친구에게 울적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전화를 걸었다.
"너 왜 집에 안들어가니? 부모님이 걱정 할 텐데 빨리 돌아가."라고 친구는 성심껏 충고해 준다.
부모님이 매일 싸움으로 집안이 시끄러운 것을 친구가 알 리 없다.
그런 집구석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이 청년에게는 친구의 충고는 수학 공식 같은 것일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그에게는 마음의 고통이 목까지 차 올라와 있는데 수학 공식이 마음에 들어올 리 만무다.
충고와 조언의 반대편에 '공감'이라는 보물이 있다.
이 공감 이라는 공구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따뜻한 관계를 유지시켜주며, 이 공감이라는 심리적 도구는 아픈 마음을 시원하게 치유해주는 청량제가 되기도 한다.
이 청년에게 누군가가 손을 내밀고 이렇게 물어 본다.
"너 무슨 일이 있니? 무슨 걱정이 있니?"
어떻게 하라는 방향 제시가 아닌 걱정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이 말은 청년과의 인간적 거리를 좁힌다.
그러니까 물어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충고와 조언을 한다.
그것은 위로와는 거리가 멀다.
내면을 모르면 먼저 물어야 한다.
상대를 진실로 알고 싶어하고 그의 귀한 존재를 인정하며 관심을 가지면 그의 가슴을 녹이는 질문이 나온다.
그 질문은 상대방의 마음을 열게한다.
마음을 열고 숨겨두었던 힘든 이야기를 나오게 한다.
이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얼마나 아팠니."라는 또다른 공감적 반응은 상대방을 스스로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내 마음을 진정으로 받아주고 나를 온전히 이해하려드는 한 사람이 있으면 내 삶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공감의 힘은 이렇게 위대한 것이다.
공감은 나라는 존재를 편견없이 받아주는 것이기에 아파하고 허물어져가는 나를 곧바로 세우고 내 안에 남아있던 행복의 작은 불씨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공감은 자격을 인정받은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호떡집 할머니도, 바쁜 학원 선생님도, 내 이웃에 열린 마음을 가진 분들이라면 누구나 공감 능력자가 될 수 있다.
아픈 마음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인내심을 초석으로 깔고 충조평판(충고와 조언 평가와 판정)을 멀리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것은 인자한 이웃 아저씨와 아줌마의 마음과 동일하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눈만 돌리면 이런 아저씨와 아줌마가 곳곳에 눈에 들어오는 공감이 만개한 사회는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나오는 훈훈하고 정겨운 사회가 틀림없다.
* 노트: 1950년대 미국에 Carl Roger 라는 심리학의 대가가 1. 무조건의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gard) 2. 받아드림과 양육 (acceptance and caring) 3. 확실한 공감( accurate empathic)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한국에서는 30년이라는 긴 세월 삶의 현장에서 깊은 상처와 아픔을 가진 사람 들을 돌보았던 정혜선 정신과 여의사 가 2018년에 "당신이 옳다" 라는 저서를 펴냈다. 여기에서 충조평판이라는 용어가 기술되었으며 그 저자는 공감은 자살하는 사람을 구할 수도 있는 CPR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