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기업인 대만 TSMC가 아리조나주에 건설 중인 반도체 생산 라인의 가동 시점을 연기하기로 했다.
첨단 반도체 장비를 설치할 전문 인력이 부족해 공기를 맞추기 어렵다는 게 이유다.
20일 류더인 TSMC 회장은 2분기 실적 발표 후 진행된 콘퍼런스콜(투자자 대상 전화회의)에서 “아리조나주 피닉스 공장의 가동 시기를 기존 2024년에서 2025년으로 연기하겠다”고 밝혔다.
류더인 회장은 전문 인력 부족을 그 이유로 들며 "당초 일정에 따라 현지에 첨단 장비를 설치할 만큼 숙련된 인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만에서 전문 엔지니어들을 파견해 현지 근로자들을 훈련하면서 첨단 장비 설치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아리조나 공장 건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직원이 대만에서 파견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TSMC는 지난달 전문 인력을 추가로 파견한다고 밝힌 바 있다.
대만 재경신보 등 언론들은 “그동안 TSMC의 아리조나 팹(공장) 건설이 인력난으로 늦춰질 것이라는 소문은 많았지만 회사가 공식 발표한 것은 처음”이라며 “콘퍼런스콜에 참여하는 경우가 드문 류더인 회장이 직접 나서서 발표한 것도 이례적”이라고 전했다.
2021년 4월 건설을 시작한 TSMC의 아리조나 팹은 현재 공장 내 최첨단 설비들을 설치하는 중요한 단계에 들어섰지만 문제에 부닥쳤다.
지난해 12월 조 바이든 대통령,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장비 반입식을 연 지 7개월여 만이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인력난은 미국 반도체 부흥 계획의 최대 장애물”이라고 지적한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 재단의 샤리 리스 이사는 뉴욕타임스에 “인프라에 막대한 투자를 해도 일할 인력을 확보하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SEMI에 따르면 2021년 이후 미국에 새롭게 지어지는 반도체 공장만 18곳이다.
하지만 반도체 제조 중심이 동아시아로 넘어간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 내 이공계 대학은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발전했고, 반도체 전공 과정을 개설한 곳도 많지 않다.
컨설팅 업체 딜로이트에 따르면, 수년 내 미국에서 부족한 반도체 인력 규모는 7만~9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퍼듀대 등이 최근 반도체 학과를 신설하고 있지만 당장 1~2년 내에 필요한 반도체 인력을 곧바로 공급하기엔 역부족”이라며 “미국 정부도 해외 전문가 유인을 위해 비자 발급 요건까지 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근무조건에 의한 구인의 어려움도 있다.
반도체 제조업체 한 관계자는 “서비스업에 익숙한 미국 MZ세대는 청결함이 생명인 반도체 공장에서 8시간 일하는 동안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인력 부족은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수년간 반도체 공급망과 생산 기지 재배치 움직임이 일어나며 지난해부터 전 세계적으로 60개 이상의 반도체 시설이 새롭게 지어지고 있다.
각국이 보조금을 내걸고 반도체 시설 투자를 유치하고 있지만 인력 양성은 돈으로 당장 해결할 수 없다.
한편 블룸버그는 생산 연기가 바이든의 대선 가도에 좋은 징조가 아니라고 전했다.
바이든이 강조해온 전기 자동차와 청정 에너지 분야 프로젝트들은 공화당의 보루라고 할 주에 공장이 있다.
TSMC 공장이 있는 아리조나는 2016년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택했지만 2020년에는 이를 뒤집고 바이든을 선택한 내년 선거의 격전지가 될 곳이다.
그런데 바이든 대통령이 공을 들인 공장 생산이 늦어진다면 이는 그에 대한 실망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TSMC의 생산 지연 소식은 워싱턴 정가의 아리조나주 의원들의 우려도 불러왔다.
피닉스에서 일하는 공화당 정치 컨설턴트 마커스 델 아티노는 이 지역의 노동시장이 빠듯해 반도체 제조업체가 노동자를 찾는데 문제를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업을 운영하는 아리조나주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숙련된 노동자를 빨리 찾는 것은 쉽지 않다"고 전했다.
그는 피닉스 지역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인해 새로운 거주자들이 유입되고, 그들이 주택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는 점도 사람을 모집하는 걸 어렵게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