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내게 가을이란 나뭇잎들이 빨갛게 물들고 날씨가 싸늘해지며, 뒷동산 물가에서 손을 씻으면 싸늘한 물의 냉기가 몸을 위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나라에 와서 살면서도 주로 북동부에 살았기 때문에 고향에서 느끼던 가을과 다름없이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것이 추억이 되었다. 더운 사막지대인 아리조나에 살면서 내가 접하는 가을은 빨간 단풍과 쌀쌀한 날씨와는 거리가 멀다.
올 10월은 유난히 더웠다. 벌써 11월 초인데도 여름처럼 날씨가 더워 짜증이 난다. 어린 시절의 울긋불긋한 아름다운 가을을 추억하는 시간에도 땀이 송송 밴다. 아리조나의 가을은 여전히 여름의 기운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이 하나같이 여름처럼 느껴져 날씨에 민감한 내 몸조차 계절에 따른 변화를 느꼈는지 사뭇 의심스럽다.
금년 여름에 북동부를 방문했다. 근 십여년 만의 일이었다. 한 달 동안 북동부에서 지낸 시간은 딴 세계였다. 교외로 운전해서 나가면 어디를 둘러봐도 파란 숲과 들판이 병풍처럼 이어졌다. 그 시원하고 아름다운 파란 풍경 속에서 내 마음은 한껏 젊어졌고 아리조나의 더위 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들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내 나이가 인생의 가을이 되었다. 혹시나 겨울로 접어들었는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런 내 나이가 가을을 더욱 그립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종종 지금 내가 사는 동네를 벗어나 북쪽으로 차를 몰아보지만 고향이나 북동부에서 보던 가을이 아니어서인지 가을을 그리워하는 가슴을 채우지 못한 채 차를 돌리곤 했다.
1980년대 초에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따뜻한 곳인 샌프란시스코에서 성탄절을 지냈다. 갔던 식당이나 호텔마다 파티들이 한창이었지만 성탄절 느낌은 들지 않았다. 눈도 오지 않고 쌀쌀하기는 커녕 반팔을 입어도 춥지 않은 그곳에서 나는 이날이 정말로 성탄절인가 하는 의아한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명절이 옛 시절에 느꼈던 감정과 똑같아야만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버릇 고치기가 힘들 듯 옛날에 지내던 명절의 느낌 또한 지우기 힘든 것임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좀 더 솔직해지자. 여든 넘은 나이는 가을을 지나 겨울의 문턱을 넘어섰음이 분명하다. 옛 가을을 그리워하기 시작한 것도 겨울의 문턱을 성큼 들어서버린 내 나이를 인식한 탓일 터. 내 나이가 겨울의 한복판으로 들어서기 전, 그래서 가을을 완전히 잊기 전, 나는 다시 한 번 가을을 떠올려 보고 싶다. 쌀쌀한 날씨와 단풍이 있고 산야가 울긋불긋 아름답게 변한 옛 추억의 가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