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 반이라는 시각이 우연히 눈이 들어올 때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칸트는 매일 그 시각에 읽던 책을 덮고 집을 나섰다. 쾨니히스베르그에 있는 자신의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짧은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습관은 나무 껍질에 글자를 새긴 것과 같다고 아일리스는 말했다. 그 나무가 커감에 따라 글자도 커진다. 세시 반이라는 글자를 새긴 칸트의 나무는 무려 80년을 자랐다. 습관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는 실패를 해본 사람은 안다, 여지껏 변변한 습관 하나 없는 내가 그 증거다. 칸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생각하는 칸트보다 걷는 칸트가 철학자 칸트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달 문인회 모임에서도 나는 칸트를 떠올리는 순간이 있었다. 세시 반이 한참이나 지난 저녁 아홉 시경이었다. 한 회원이 자신의 습관을 주제로 발표를 마쳤을 때 그 회원의 얼굴에 겹쳐오는 얼굴이 칸트였다. 칸트의 규칙적인 삶에서 경이감을 느끼듯 나는 오랫동안 지속됐을 그 회원의 의지와 그 의지로 길들어진 습관이 부러웠다. 부러워했던 사람은 나만은 아닌 듯 회원들은 계속해서 습관에 대해 얘기했고 마침내 하나의 안건으로 귀착됐다. 새해를 맞아 첫 모임이었으니 새해 맞이 프로젝트, 라고 명명해도 될 법한데 다음 달 모임까지 올 한 해동안 이어갈 습관을 정해오는 것이었다.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지만 좋은 습관 하나 없는 내게는 꼭 필요한 프로젝트였다. 무엇을 습관으로 삼을까, 하는 고민은 모임이 끝나는 순간부터 시작됐다.
한 주는 빠르게 지나갔고 습관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깊은 산 어딘가 꼭꼭 숨어 찾기 힘든 산삼처럼 내 보물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이 사물의 윤곽을 제대로 파악하는 순간임을 나는 그때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달 모임까지 아직 여유가 있으니 서둘러 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의 끈을 늦추는 순간 내 머릿속이 반짝했다.
2017년 송년회 모임에서 장기 자랑 시간이 있었다. 한 회원이 무대로 성큼성큼 걸어나가 시작한 팔굽혀 펴기가 무려 50개였다. 나는 열 개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 내 입이 쩍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은 회원이었다. 팔굽혀 펴기, 바로 그것이었다.
팔굽혀 펴기로 습관이 정해지자 팔뚝이 근질거렸다. 바닥에 등을 대고 있던 몸을 뒤집어 시작한 팔굽혀 펴기는 열 개를 간신히 채우고 끝이났다. 그러나 열 개는 시작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칸트는 길게 살았다. 80년을 살았다. 18세기 당시 남성 평균 수명이 40살이 채 안되었다고 하니 평균 수명의 두 배를 산 것이다. 현재의 팔십 세 평균 수명으로 따지면 160년을 산 셈인데 과연 규칙의 화신, 칸트답다. 그러나 나는 칸트처럼 평균 수명을 훨씬 웃도는 긴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내 시대의 평균 수명만큼만 살면 그게 내겐 대박이다.
평균 수명의 삶을 생각하자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내가 팔십까지 산다면, 긴 세월의 팔굽혀 펴기로 가슴이 오똑 솟은 이 몸은 과연 몇 개의 팔굽혀 펴기를 해 낼 수 있을까. 나이 육십을 훨씬 넘긴 회원이 거뜬히 해치운 50개를 상상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거기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라도 팔십까지는 매일 팔굽혀 펴기를 하며 기를 쓰고 살아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