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빠질 리 없었다. 장군도 예외는 아니었고 사장이나 판사는 많았다. 택시 운전사가 되겠다는 학생은 그가 유일했다. 아마도 그때가 초등학교 1학년쯤이었을 것이다. 막 입학한 어린 학생들의 장래 희망은 선생님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던지 그냥 지나치는 선생님이 없었다. 내 담임 선생님도 예외는 아니어서 맨 앞줄 학생부터 먼 훗날에 바라는 직업이 무엇인지 물었다. 어린 학생들은 하나같이 입을 크게 벌려 미래의 자신을 또박또박 말했고 선생님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반복되는 상황은 그 친구에게서 멈춰졌다. 택시 운전사라는 그 친구의 말에 조용하던 교실이 잠시 어수선해졌다. 여기저기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담임 선생님이 이유를 묻자 교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선생님도 장군이나 판사와는 달리 택시 운전사가 어린 학생의 장래 희망치곤 꽤나 낯설고 흥미로웠던 모양이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은 거기까지다. 그 친구의 대답은 택시 운전사가 되겠다는 희망만큼이나 특이하지 않았는지 지금 내 기억에 없다
2004년인가. 노벨 연구소에서 세계 명작 100을 선정한 적이 있다. 선정된 작품 100개 중에서 유독 1위만 따로 발표했는데 그 이유는 1위 작품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1위 작품을 확인하고는 셰익스피어나 괴테, 토스토예프스키를 예상한 나로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리 의아해할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의아해했던 사실이 더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유명한 작품이다. 인간의 유형을 들먹일 때 셰익스피어의 햄릿형과 더불어 돈키호테형이 등장하는 것만 봐도 세르반테스의 작품 ‘돈키호테’가 인간 사회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했는지 알 수 있으니까.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돌격한 돈키호테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거인이면 사소한 시비라도 피해야함은 코흘리개 아이라도 아는 상식인데 돈키호테의 세계에는 그런 상식이 없디. 돈키호테는 자신의 세상에서 자신의 신념대로 살았다. 오늘날 흘러 넘치는 정보를 쫓아 판박이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의 세상을 환상이라 부르고 그의 행동에는 과대망상증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돈키호테는 죽는다. 때 이른 죽음이었다. 돈키호테의 죽음의 시작은 환상이 깨지는 순간부터다. 돈키호테의 과대망상적 행동을 우려한 동네 사람들은 돈키호테의 환상적 세계를 깨뜨리려고 합심한다. 동네 사람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환상이 깨진 세상에서 돈키호테는 로시난테를 다시 탈 수 없었다. 풍차로 돌격하는 행동도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죽어가는 돈키호테만 있을 뿐이었다.
돈키호테는 어린 시절의 택시 운전사가 되겠다는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그도 누군가에 의해 그 꿈이 깨어졌을까. 택시 운전사가 다가올 미래에 희망을 품을 만한 직업은 되지 못한다는 세속적인 현실로 그도 결국은 돌아오게 되었을까. 돈키호테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그가 생애 끝까지 자신의 세상에서 자기 신념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일텐데 내가 김효섭이란 이름도 또렷한 그를 한 번 만나고 싶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택시 운전을 하는 그의 모습을 나는 보고 싶은 것이다. 돈키호테의 동네 사람들처럼 혹시 그때 킥킥대던 우리가 그의 환상을 깬 것은 아니었는지. 그것이 나만의 쓸데없는 우려였음을 그를 만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몇 년전 쓰다만 소설에서의 주인공이 택시 기사다. 그 친구를 모델로 한 소설이었으므로 당연한 것이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끝을 맺지 못했다. 지금, 그 소설을 마무리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은 그 생각이 자신의 세상에서 자신의 신념대로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그를 만나고 싶다는 심정과 맞물리기 때문일 것이다. 돈키호테를 죽음으로 몰고간 환상이 깨진 세상은 김효섭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의 소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