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서 오신 신부님으로 부터 500불을 빌려 유학을 왔다. 그때가 1965년이었고 내 나이 서른이 넘었다.
한국을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한 곳은 로스앤젤레스였다.
내 생일 기억하듯 지금도 기억하는 날, 1965년 7월 31일.
로스앤젤레스에 도착은 했으나 나의 최종 목적지는 동부에 있는 필라델피아였다.
내 수중에는 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500불 중 350불 비행기표를 내고 났더니 고작 150불이 남아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필라델피아까지 비행기편은 150불, 기차는 199불. 그리고 버스는 88불이었다.
기차가 비행기보다 더 비싸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며 비행기를 타고 싶었지만 수중에 지닌 돈으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버스 뿐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버스 여행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그레이하운드역에서부터 3일 동안의 여행은 시작됐다.
버스는 쉬지 않고 달렸고 체력이 소진된 운전사는 8시간이나 9시간마다 바뀌었다.
배가 고플 때쯤 버스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침에 30분, 점심에 30분, 그리고 저녁에는 45분. 버스에서 내려 한국에서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로 배를 채웠다.
운전사는 지나가는 도시마다 이름을 불러주었다. 모든 도시가 내게는 생소했지만 특히 기억나는 도시는 인디오였다. 야자수가 즐비하게 늘어선 곳에 하와이를 떠올렸으나 검푸른 바다는 주위 어디에도 없었다.
다음 도시가 피닉스였다. 그때는 피닉스 역시 생소한 이름이었다.
운전사가 피닉스라 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그마한 시골 동네같은 느낌이었다. 타고 내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열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십 년 이상을 산 지금이야 8월의 여름 더위에 익숙해졌지만 그 당시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용광로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땅에서 올라 오는 열기가 버스 안에 앉아있는 내게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미래의 어느 날에 내가 이곳에 정착하러 올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조그만 동네의 뜨거운 여름 한 낮이었다.
피닉스를 출발한 버스는 플랙스텝을 경유하여 역사적인 도로 66번을 탔다. 뉴멕시코의 알버커키를 지나고 넓게 펼쳐지는 평원에 깜빡깜빡 조는 동안 텍사스의 아마리로를 지났다.
오클라호마, 미주리, 인디애나, 오하이오를 지나는 동안 밤이 지나고 붉은 태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펜실베니아. 무려 74시간의 여행이었다.
볼거리가 많았던 여행에서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세인트 루이스의 게이트웨이 아치였다. 지금은 높이 192미터로 뉴욕 자유의 여신상의 2배지만 그때는 아치가 양쪽으로 반쯤 올라간 상태였다. 반쯤 올라간 상태도 거대한 자태여서 완성이 되면 얼마나 거대할까 하는 궁금증으로 그 곳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동부에서 37년을 살았다.
아리조나에서 살겠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리조나는 내게 버스 창밖으로 보이던 뜨거운 열기를 땅에서 뿜어올리던 도시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아리조나로 왔고 벌써 16 년이 다 되어간다.
다행스럽게도 아리조나는 뜨거운 것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었다. 겨울은 낙원이었다.
해군 근무시 동남아 순항으로 몇 나라를 다녀온 기억이 있지만 동남아의 더위는 습기 때문에 땀이 비오듯 나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아리조나 더위는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한 기운마저 느낄 수 있어 여름 지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태풍 없고, 지진 없고, 회오리 바람 없고, 겨울이면 눈 삽질할 필요 없고, 얼음 위에서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아리조나다.
오늘 뉴스에서 70도의 쾌적한 기상일보를 듣고 새삼스럽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글을 한 번 써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글을 마무리 짓는 지금 나는 아리조나에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