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항이나 항복같은 단어는 제로니모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미군의 인디언 토벌군 대령관 넬슨 마일스의 권유의 말을 듣고 제로니모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방금 뭐라 하셨소? 투항 어쩌구 저쩌구 하셨나요?”
“그렇소. 그것이 하나 뿐인 당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길이요. 우린 5000명인데 거긴 고작 50명이요. 현명한 판단이 무엇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요.”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리는 제로미노에 비해 마일스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우리 아피치족은 늘 그래왔소. 늘 소수였단 말이요. 그쪽이 오천 명이 아니라 오만 명이라해도 두려울 건 없소.”
전혀 동요하지 않는 제로미노의 모습에 마일스는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이 부르는 당신의 이름을 생각해 보시요. 성인 제로미노 아니요. 피를 불러 오는 게 성인이 할 짓이라곤 생각치 않소.”
제로미노는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고야틀레이’가 본명이었다. 고야틀레이는 ‘하품하는 자’라는 뜻인데 낮잠조차 잘 시간이 없는 그에게 하품하는 자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 새롭게 붙여진 제로미노라는 이름도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벌써 40년이 지난 일이다. 지금 1886년이야 미군과 싸우지만 그당시 전쟁의 상대는 지역 경계선을 같이하는 멕시코였다. 그의 아파치 부족과 가까운 지역에 카스키예 멕시코 마을이 있었고 그 마을의 신부, 도미니크는 인디언을 혐오하고 싫어했다. 그 혐오감의 정도가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감과 동격이었다. 그러니까 도미니크 신부는 100년 먼저 태어난 히틀러의 선조격이었던 셈이다. 인디언은 쥐꼬리만한 영혼도 없다는 것이 혐오의 가장 큰 이유였는데 도미니크 신부의 악마같은 영혼이라면 차라리 영혼이 없는 편이 낫지 않을까. 도미니크 신부에게 충성을 바치는 카스키예 멕시코 군대는 오로지 인디언 사살이 존재 이유였다.
카스키예 마을을 지키는 수호 성인이 제로미노였다. 17세의 고야틀레이는 홀로 성당으로 향했다. 그날은 제로미노 성인의 생을 재현하는 무대가 펼쳐지는 축일 날이었다. 공연 무대에 느닷없이 올라선 사람은 헝클어진 머리에 두 뺨에 노란 줄무늬가 그어진 인디언이었다. 이미 술을 한 잔 걸진 멕시코군 대장에게 무대 위에 선 작은 체구의 인디언은 독안에 든 쥐였다. 대장은 잠시나마 인디언을 놀려줄 생각으로 두 손을 허공으로 뻗어 올리며 외쳤다.
“제로미노 만세”
도미니크 신부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도 제로미노 만세,를 따라 외쳤다.
‘영혼이 없는 사람들이말로 여기 있었군.’
작은 인디언은 활에 화살을 꽂았다. 도미니크 신부가 쓰러진 것은 눈깜짝할 새였다. 성당 안이 소란해지며 사람들이 도미니크 신부에게로 모여들었고 멕시코군 대장의 술 기운이 확 달아나며 정신을 차렸을 때 무대 위는 이미 잠잠해진 뒤였다. 그 후 멕시코 사람들은 그를 제로미노라 불렀고 아파치족 사람들도 그의 용맹성을 기리며 덩달아 그렇게 불렀다. 한 신부를 죽이고 붙여진 성인 이름이라니. 카톨릭은 어차피 아파치족이 믿든 자연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에게 붙여진 카톨릭 성인의 이름은 그러니까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제로미노에게 마일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내일 정오까지, 그러니까 9월 4일 정오까지 투항하지 않으면 당신의 아파치 부족은 피바다가 될 것이요.”
단호한 마일스의 목소리에 제로미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이상 마일스와 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였던 것이다.
스켈리온 케년에 어김없이 찾아온 밤은 높은 산악지역이라 9월 초이긴 해도 공기가 차가웠다.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은 사람들은 제로미노의 수족이 되어주는 믿음직한 대원들이었다. 그 중에는 아직 아내가 살아있는 자도 있었고 자식이 있는 자도 있었다. 밤의 침묵을 깨며 제로미노가 입을 열었다.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제로미노 왼쪽 옆에 앉은 대원이 고개를 제로미노에게 돌리며 말했다.
‘저희는 지금까지 추장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오늘 밤이라 달라질 일은 없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리 없겠지만 그들은 제로미노가 이번에도 기적을 일으키리라 믿었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5000의 포위망을 단숨에 뚫어리라 믿었다. 전쟁 주술사라 불릴 만큼 제로미노는 적을 치고 빠지는 데 신출귀몰했던 것이다. 그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 몇 십 년을 반복해온 터라 그들의 믿음은 철옹성이었다. 비록 많은 대원들이 희생당하고 지금은 고작 50명도 채 남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믿음의 철옹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늘은 푹 자도록 하세. 오늘 밤은 저들의 공격도 잠잠할 테니 보초병을 세울 필요도 없네. 모두들 편히 자게나.”
계곡의 깊은 어둠 속에서 외롭게 빛을 밝히는 모닥불 앞에 제로니모는 혼자 남았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결정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멕시코군에게 어머니와 아내와 어린 자식 셋이 몰살 당한 게 삼십 년 전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불같이 타오르던 증오심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수그러들었던가. 마일스 앞에서 큰 소리를 쳤지만 그는 전쟁과 항복 사이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무참히 죽음을 당했지만 아직 살아있는 대원들의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백인들 말을 믿는 그가 아니었지만 투항을 하면 고향인 아리조나로 돌려주겠다는 마일스의 말은 여전희 그의 뇌리 속에 남아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계곡에서 모닥불은 유난히 붉게 타올랐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불나방이 한 둘이 아니었다. 불나방들이 불 속으로 미친둣이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들 때마다 따다닥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제로미노는 한 마리의 불나방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모닥불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 불 속으로 날아들지 않는 불나방이었다.
불 속으로 날아들지 않는 불나방을 불나방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두 손을 모닥불 쪽으로 휘저으며 불나방을 불 속으로 유인했다.
“빨리 날아들어. 빨리 날아들란 말이야.”
그러나 불나방은 그가 손을 저을 때마다 모닥불에서 멀어질 뿐이었다. 불나방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그는 손짓을 멈추었다. 그러나 손짓만 멈추었을 뿐, 그의 두 눈은 불나방이 사라진 짙은 어둠 속을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었다.